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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BY 마음 2002-08-28

겨우 한 달 만에 찾아들어가는 집인데 왜 이렇게 낯설은지....
준우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함께 걸어 다녔던 그 길을 지나 골목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내 머릿속에선 필림처럼 장면,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냄새도 여기서 맡았고 엄마의 처진 어깨도 여기서 보았다.
밤이면 더욱 커지는 구두발소리... 달빛에 휘청거리던 내 모습도 이젠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예상대로 집은 비워져 있었다.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주방...
다시 엄마의 방을 열고 들어가 본다.
티브이 위에 놓여있는 아버지 사진, 엄중하게 말해서 현화아버지 사진이 제일 먼저 날 반겼다.
예나 지금이나 화장대 위며 어디 한군데도 달라져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막 한바퀴 둘려보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현화가 일려준 얘기가 생각이 나서 장롱문을 열어보았다.
서랍위에 놓여져 있는 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들어보니 묵직하다.
그걸 밖으로 꺼집어내어 지퍼를 열어보았다.
예상했던대로 성경책이다.
뒷부분에 찬송가가 함께 묶여져 있었는데 그 책갈피에 반듯하게 접혀진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교회 예배에 필요한 주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주보에 적혀진 교회 이름이 준우엄마가 다니는 교회이름이 아닌가.
분명 이건 아닌건 같은데... 이런 방법으로 뭘 어쩌자는건지...
가슴이 너무 뛰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너무도 반가와 어찌할 줄 모르던 엄마의 표정이 내 손에 들려진 성경책을 보는 순간 난색을 나타내더니 슬금슬금 내 손에서 그것들을 빼내어 제자리로 갖다 놓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딸, 얼굴 한번 보자...”
그리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내 손을 잡고 끌어 앉혔다.
“현화한테 들었어. 설마 했는데...”
“뭐? 교회나가는거....?”
“으응..”
“지난번에 너한테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덕산을 떠나오면서 지금까지 난 단 한번도 내가 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왔는데 뭐가 이상하니?”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엄마가 내 눈을 금방 피하려 했지만 엄마한테서 느껴져 오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왜 하필이면 준우엄마가 다니는 교회를 다녀?”
“여기서 제일 가깝고 내가 원래 장로교였잖어. 그리고 준우엄마도 그러자고 했고...”
“따로 또 만났어?”
“지난번 일 나가던 거 그만두고 우리집에도 한번 왔었어...”
“우리집에?”
“그 사람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야... ”
“엄마! 나 준우하고 결혼 안해..”
“.......”
“그러니까 엄마 이러는거 나를 위해서라면 안 이래도 돼...”“.............”
“그러니까 준우엄마 앞에서 비굴하게 굴지 말어”
“기집애, 못하는 소리가 없어. 엄마한테...”
“내가 잘못했어. 그건 내가 실수한거야. 하지만 엄마가 굳이 나서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마.”
“알았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거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들고온 종이 가방안에서 감청색 줄무늬가 시원하게 사선으로 그어진 선물 상자 하나를 엄마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첫 월급 탄 기념으로 산거야. 내의는 아니고 브라쟈...”
레이스가 화려하게 들어간 연한 개나리빛 속옷 셋트를 보더니 당장 얼마 줬냐며 다그친다.
“뭘 그런걸 물어?”
“얘가.... 내가 아가씬냐?”
“지난번 엄마, 나 졸업식때 기억 안나? 현화하고 엄마 옷 가지고 뭐라 그런거...그때 현화하고 약속한게 있어. 이제부터 엄마, 그렇게 사구려티나는 옷을 안 입게 할거라고... 나 요사이 많이 행복해... 저녁으로 시간나면 꾸준히 공부를 해 볼 생각이야... 그리고 준우 문제도 시간이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 때문에 준우엄마한테 기죽는 일은 절대 하지마, 나 그거 죽기보다 싫어. 죽기보다 싫어....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준우엄마가 싫어....다른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싫어... 준우가 이쁘면 그를 나아준 부모도 이뻐보여야 하는데 아니야.... 싫어.... 날 이뻐해주는 사람하고만 살고 싶어. 난 엄마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
“서울에 좀 있었다고 말투부터 달라지는거냐? 갑자기 니가 현화처럼 느껴져...”
“나 원래 그랬어.. 할머니한테 내가 얼마나 못 된 아이였는데... ”
“아니야.... 넌 못 된 아이는 아니야. 할머니한테만 그랬었지.... 원래는 너처럼 착한 아이는 보질 못했어. 그래서 내가 더 마음이 아리웠는데.... ”
엄마의 손이 내 머리위로 올라온다. 그리곤 손빗을 하고 긴 생머리를 빗어내렸다.
아직도 엄마한테 나는 어린 아이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