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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BY 마음 2002-08-23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준우는 여전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를 묻고 한번 올라간다는 말을 전화 할 때 마다 했다.
또 그런 전화를 은근히 기다리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한심해 보였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현화가 섭섭하니 뭐니 하면서 다짜고짜로 전화 좀하란다.
그리곤 처음엔 그저 안부 차 전화했다고 하더니 엄마가 요사이 갑자기 교회를 나가고 있다며 걱정어린 말투다.
나한테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럴까?
현화말로는 갑자기는 아닌 것 같고 내가 떠나오기 전부터 그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엄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마음으론 주를 모시고 있다고 했던 그 말이 들을 당시에도 개운하게 듣기진 않았었는데...
이미 그때 벌써 나가고 있었든지 아니면 준비라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예전에도 그렇게 열심히 다닌 적이 있었고 나 역시도 유년 때에는 교회 문턱을 드나들던 아이였지 않은가.
근데도 왠지 낯선 이 느낌은 뭘까,
엄마의 또 다른 의식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간다.
그 옛날 그렇게 긴 시간을 한결같이 해오던 그 정성스러운 의식은 이제 막을 내렸지만 다시 그 정성을 쏟을만한 또 다른 문제가 엄마한테 있다는 결론이다.

내가 언니라고 부르던 일연이 엄마는 친동생 이상으로 내게 잘해 주었다.
그것이 서서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객지라는 생각을 잊게도 해 주었다
이렇게 서서히 새로운 환경에 젖어들어 가고 있음은 분명 이 모든 것들이 순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달을 보내고 첫 월급을 타던 날이었다.
첫 월급이고 해서 동료들에게 저녁 한끼로 신고식을 하고 곧 바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란제리 코너에서 내 생전 처음으로 유명 브랜드 이름이 찍혀있는 브랴쟈와 그에 맞는 팬티를 한 세트로 사고 거금 육만이천원씩이나 지불하고는 이래도 되나 그런 맘이 들었다.
엄마한테 이제는 정말 괜찮은 것으로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벌써부터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수준차이라는 거,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주제가 얼만큼인지...우리 엄마는 또 어느 정도의 수준이어야 하는지... 갑자기 혼란이 와서 커피한잔을 뽑아들고 휴게실에 마련된 소파에서 지나가는 이들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속옷이라는 것이 겉옷하고 달라서 잘 입어도 그만 대강 입어도 그만, 하지만 속옷은 잘 입어야한다는 게 대부분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혹은 상설매장에서 이사람 저사람 뒤죽박죽으로 엉켜서 만졌던 것이나 심지어 때가 꼬질꼬질해 보이는 그런 브랴쟈들도 깨끗이 빨아 놓으면 이거나 저거나 뭐 별다를가 싶은데도 왠지 싫은 것은 일종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또 다시 그렇게 비싼 속옷을 사 줄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엄마한테서 지나간 흔적들을 씻어 줄 수 있는 것들로 바꿔 주고 싶은 게 희망이면서 결심이기도 하다.

종이컵을 꼬깃꼬깃 구기면서 준우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서라도 꼭 선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날 여기까지 오게 했는데 그것에 비하면 내가 이 정도의 선물로 끝내버리겠다는 생각이 미안할 정도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를 생각해 놓고 보니까 내가 그에게 해준 선물들이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내 궁핍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날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선물조차도 해 줘 본적이 없었다.
정말 괜찮은 넥타이 하나를 선물로 골랐다.
단색이 아니라 서너가지 색이 혼합되어 보이는데다가 약간의 광택과 펄이 들어간 은색 빛깔의 블루톤이었다.
내가 깨끗이 다림질해서 준비해 놓은 와이셔츠를 입히고 내가 골라주는 넥타이를 메어 주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면 그는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출꺼야.
그러면 그의 냄새에 잠시 취한 듯 어린아이처럼 코맹맹이 소리로 일찍 오라고 당부를 하겠지.
점원이 포장을 하고 돈을 지불하는 동안 꾼 그 잠깐의 꿈이 깨어날 무렵 눈앞이 뿌옇게 변해 있었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흘려 내릴 것만 같아서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는데 점원이 친절하게도 쇼핑백을 내 손에다 들려준다.
잠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나 허둥거리다가 하마터면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칠 뻔 했다.
정신없이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걸음을 옮길때 마다 다른 걸음이 시작 되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벌써 두 정거장을 지나고 있었다.
막 시장입구 간판이 보이는 가 싶더니 왠 낯선 남자가 아는 척을 한다.
“경희 아니니?”
“아닌데요....”
“거짓말 하지마!”
“아니라니까요!”
순간 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그제서야 깨닫고는 주위를 살폈다.
마침 택시한대가 정차 중이었다.
뒷문을 열고 타려는데 오히려 그 남자가 날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흐흐.. 그럼 더 좋지... 여기보단....”
오히려 더 위험하겠다 싶어서 다시 밀치고 나와서 다시 주위를 살펴보지만 아무도 날 도와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스카프 지갑 같은 걸 늘여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빨리 도망이나 가라며 슬금슬금 눈을 피해가며 일려주었다.
오늘따라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뛰는 것도 자신 할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시장안으로 뛰어 들었다.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내고 무조건 뛰기만 했다.
몇 개의 골목을 거쳐서 지났는지 모른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조차도 모르겠고 이미 골목엔 짙은 어둠이 깔려져 있었고 내가 멈춘곳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술집 앞이었다.
차오른 숨을 가다듬는데 그 술집 안에선 시끌벅절한 소리가 끊임없이 흘려나오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선술집은 매일 같이 술 먹은 이들의 절절한 노래가 큰길까지 흘려 나오곤 했는데 그런 시절에 알고 있는 선술집의 풍경이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떠오른다.
그 속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않으려고 하면 더욱 달라붙었다.
손에는 엄마한테 줄 최고급 팬티와 브랴쟈 한 세트를 담은 쇼핑백이 꼭 쥐어져 있었지만 이 속옷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