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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BY 마음 2002-07-26

일주일을 보내고 차츰 나한테도 마음의 여유라는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엄마하고는 수차례 전화를 주고 받았지만 준우 대한 말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엄마도 내 속을 알고 있어서이겠지만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도 있었는데 지난번 내게 해준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일축할 모양이었다.
‘만나야 될 사람이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사람의 연은 하늘이 정해 주는 것이니까....’
그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서운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밀어내기로 마음먹은 판에 내가 그런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 아닌가 해서다.

주인집 꼬마가 간혹 좀 성가시다고 생각한 것 외에는 아파트 생활인데도 그다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인아저씨는 2교대 근무를 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밤이면 마음씨 좋은 젊은 아주머니와 초등학교 이학년인 현경이와 여섯 살 먹은 남자아이 일연이가 전부 였다.
간혹 그들과 함께 거실에서 과일도 먹고 티브이도 보고 그 속에 끼여서 밥도 얻어 먹기도 하면서 태연해져 가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인아주머닌 남편이 없는 날이면 거실 하나 가득 부업거리를 가져다 놓고 일을 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선줄이라는데 목장갑을 끼고 색깔도 고운 가는 전선줄을 차례차례 끼우는 작업이었다. 한줄씩 끼워져서 제 자리를 찾을 때 딸깍 하고 나는 그 소리는 듣기에도 재미있는 경쾌한 음이었다.
아주머니도 그것 때문에 더 재미있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
나도 거들겠다고 나서 보지만 잘못하다간 오히려 다 망쳐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저 하는냥을 쳐다 보고만 있었다.
“현희씨! 어쩜 그렇게 곱게 생겼어요?”
옆에서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던 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툭 내뱉듯이 던진 말이었다..
“제가요?”
“처음 현희씨가 우리집에 왔을때 사실 좀 부담스럽더라. 왜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편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
“지금도 그러세요?”
“아니... 그 반대....”
“언니라고 불려도 되죠?” 큰애 나이로 봐서는 삼십대 초반은 분명 되었을 텐데 그녀에게 특별한 동안(童顔)이 있었다.
자그마한 몸에 알맞게 붙은 살집이며 말할 때 보이는 작은 미소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야 좋지. ”
“근데.....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일연이요......... 이름 누가 지어 준거예요.....?”
“왜요?”
“역사에 나오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뭔가가 있어 보이잖아요. 흔한 이름은 분명 아니예요.”
“아이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는데 어디가서 지어 오셨다고 그랬던 것 같애요. 손이 귀한 것도 있지만 그 쪽 시댁쪽은 원체가 불교성향이 짙어서....”
“어....정말 그래요? 그럼 스님이 지어 주신거 아닌가 몰라....”“아마 그랬을 거예요. ”
“근데 전 그 이름이 너무 좋은데요...”
하얀 얼굴은 그 정도가 보통 이상이고 그 동그랗고 깊은 눈은 처음부터 동자승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아이였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럴까, 어쩌다 그 아이의 팔을 만져보면 그 느낌이 말랑말랑한 것이 아기한테서 느끼는 그런 기분하고도 또 다른 정말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한테 민망할 정도로 자꾸만 그 아이를 안고 싶은 게 나도 그런 마음이 순간 순간에 들어서 사실은 자제가 잘 안 되었다.
같이 데리고 자고 싶고 늘 안고 있고 싶었다.
그런 반면에 위로 누나인 현경인 그 반대다.
그 아이의 가느다란 팔뚝은 내게 그저 하나의 나무막대하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일연이한테서 느끼는 기분하고는 정말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이가 애기 같아서 그렇겠거니 그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그 아이가 내게 매우 특별하게 느껴져서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줄 알았다.

그날도 아이들은 당연한 것처럼 내 방에 들어왔다.
장난감 하나 없는 내방이 뭐가 그리 좋은지 두 녀석은 호시탐탐 그 기회만 엿보는 듯 했다.
먼저 현경이가 고개를 삐죽 들이밀고 이모, 나 놀다가도 돼요? 한다.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여놔서 이젠 정말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 상태가 심각함에도 그냥 좀 참고 말지 해 버렸다.
그러면 아이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내가 잘 만들어 먹는 토스트 한조각을 받아쥐고서야 나갈 녀석은 나가고 그래도 아직 미진한 녀석은 개어놓은 이불위에 앉아 있기도 했다가 그것도 심심하면 쿤쿤 뛰기도 하는데, 일연이 같은 경우에는 들고 들어온 장난감총부리를 내게 겨누고 탕탕해댄다.
아이엄마 말로는 아이가 그 나이 또래에서 조금 떨어진다고 했다.
내게 숨기고 싶었을텐데 어차피 한집에 살 바에는 사실대로 얘기해주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이는 정말 해맑은 얼굴이다.
그 속에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능력이나 사회성이 좀 떨어진다고 해서 이 아이를 바보 취급한다는 것이 화가 날 정도였다.
“이모, 내가 탕탕하면 윽 하면서 죽어야 돼......”
나는 아이가 하라는대로 죽는 시늉을 한다.
그리곤 잠시 눈도 뜨지 않고 계속 죽은 듯이 누워 있어 버렸다.
아이가 말한다.
“이모, 눈 떠! 이제 다시 살아나야지......”
그래도 꿈쩍않고 누워 있으려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이모 죽으면 나 엄마한테 혼난단 말이야...으으 빨리 일어나...”그 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와락 아이를 부둥켜 안았다.
그건 놀래키려고 그랬던 것 뿐인데 그 아이가 내 품으로 들어와 안기면서 그 아이를 만지는 손끝으로 뜨거운 그 무언가가 뻗치고 올라와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아이의 그 말랑말랑한 몸을 만지고 싶어서 가끔씩 일연이만 따로 부르거나 무릎에 앉혀서 책을 읽어 주기도 하는데 그러고 있는 동안은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가빠지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제 엄마한테로 되돌아가고 나면 잠시동안은 아무 일도 못하고 멍하니 거울을 보거나 창밖만 쳐다보게 된다.
내가 왜 이러는지...... 특별하게 아이가 이쁘기 때문인지, 아님 나한테 다른 무언가가 잠재되어 있었는데 이제야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인지,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럴 수도 있겠거니 스스로 주문을 걸어 보기까지 하지만 아무 것도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