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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BY 마음 2002-07-15

병리기사로는 첫 직장인데다 특별히 계획하고 정한 곳은 서울근교에 있는 J시였다. 마음으로는 좀 한가진 바닷가 쪽이나, 그렇게 기대를 했었는데 그런 곳에 자리를 얻기란 사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J시내 한 중심가에 있는 종합병원, 하지만 겉으로 봐서는 그다지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하 계단으로 내려오면 입구에 방사선과가 있고 또 마주 보고 병리실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라는 것이 좀 그랬지만 병리실 만큼은 천장을 가득 메운 형광등 불빛에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병동에서 내려오는 각종 검사물로 나까지 합쳐서 네명의 병리기사가 모두 매달려서 해도 빡빡한 업무였다. 거기다 외래로 들어오는 환자들의 혈액채취 까지 배워가며 하자니 나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툭하니 불거져 나오는 혈관인데도 바늘끝의 감이 오지 않아서 터뜨리기 일쑤이고 나이로 봐서는 고참 나이인데 신졸로 입사하다 보니 기존 멤버들에게 눈치 보이는 것도 그렇고 출근해서 퇴근까지는 내 개인적인 생각 같은 것은 할 겨를도 없이 하루가 훌쩍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집을 떠나온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집에는 서너통, 준우한테는 한통의 전화도 주질 못했다.
근무시간이라고 일부러 전화기를 꺼 두기도 했지만 그의 전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볼 심사였다.
이를 악물고 내가 버텨내야 할 부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떠나온 이유가 없는 셈이 된다.
어쩌다 그의 목소릴 듣고 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알기나 하는 것처럼 준우의 공격은 더 거세어졌다.
“네가 그렇게 하는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한테 강요하진 말어, 네가 전화하지 말랜다고 안할 것도 아니고....”
“알았어....”
“내가 올라가면 만나 주기는 할거니?”
“글쎄, 만나서 뭘 어쩌자고.....”
“나한테 떠나고 싶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기도 하겠네....”
“떠난다고....?”
“그럼....아니니?”
“맞어.... 헤어지는거지 뭐!”
“헤어진다는 말, 진심이니?”
“진심이지...그럼?.”
“알았어. 그러지 뭐!”
그렇게 전화가 끊기고 나면 영락없이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잘못 했다....”
“뭘?”
“아무튼....”
“니가 잘못한건 없어.....”
“아무튼.....”
“할말 없으면 끊어......”
“끊지마! 현희야, 끊지마!”
전화선 너머 그 끝닿는 곳에 준우가 지금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번도 그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지금껏 지내왔는데 내가 지금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
“니가 포기해, 응? 현희야, 니 생각, 다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애.... 하지만 이건 아니야.... 알겠니? 이렇게 쉽게 헤어질 만큼 우리 사랑,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거니?”
“난 쉽게 헤어진다고 생각한적 없어...”
“다 너 혼자서 계획해 놓고선.....”
“그러면 너 붙들고 이런 일을 의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래... 모두가 내 잘못이다. 내가 널 너무 혼자있게 내 버려뒀어...”
“살면서 우리 같이 이렇게 헤어지는 일들 흔히 있는 일이야...”
“다시 만나는 일은?”
“무슨 말이야?”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야. 이건 현실이야. 너 나 안보고 살 수 있니?”
“살아봐야지.....”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돼!”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구나?”
“그게 전부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그 이유의 전부라면 넌 지금 큰 실수를 하는거야. 알았니? 너의 엄마하고 우리 엄마 사이에 그런 문제? 아니면 우리엄마와 너와의 관계?”
“..................”
“현희야! 내 말 똑똑히 들어, 난 니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마음이 변한거라면 몰라도 그 외의 이유에서라면 절대 너 그냥 보낼 수 없어. 알았니?”
“왜 갑자기 그렇게 변했어?”
“뭐가?”
“지금까지는 이러지 않았잖아..”
“나도 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의 말이 내 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정말 기다려 온 것이 이런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도 정말 힘들어”
“네 옆에 늘 내가 있었잖아.....난 늘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니었니?”
“몰라....”
“보고 싶다 현희야! 정말 보고 싶어! ”
“미안해....”
“너는 나 안 보고 싶니?”
“보고 싶다고 다 보고 살 수는 없잖아...”
“그렇지.... 하지만 지금 너처럼 그렇게 니 맘대로 떠나버리고 나면 나는..? ”
“미안해....”
“사랑한다고 말해 줘!”
“미안해....”
“끝까지 미안하다는 소리만 하는구나!”
“.............”
“현희야! 나 너 아니면 절대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아.... ”
세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그와의 통화는 온통 그의 여운으로 남아서 떠 도는 듯 했다.
엄마가 새로 사다 놓고 간 전기밥솥에서는 한창 밥물이 끓고 있다. 반찬은 김에다 김치만 넣고 손으로 둘둘 말아 그냥 한번 먹어 봐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그 맛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맨 김만 먹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 즘에 이미 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