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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BY 마음 2002-05-27

이런 추운 밤공기 속에서도 그의 냄새가 간간히 느껴져 온다..
“굳이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갈 필요 있니?”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내손을 빼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멀어서? 그게 아니면 내가 하자는 해.”
이번엔 그의 팔 하나가 다시 날 감아 안는다.
말없이 그것을 걷어냈다.
“왜....? 싫으니? 내 생각엔 너하고 나 사이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면, 특별히 그런 것들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들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우린 지금 너하고 나처럼 이렇게 우리 사이를 풀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대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니? ”
“네가 모르는 게 있어. ”
“뭔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 상관없어.”
“너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의 엄마는 그렇지 않을꺼야. ”
“우리 엄마? 그렇게 심각한거니?”
“그래..... 너도 어쩜 알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라.”
“무슨 얘긴데 이렇게 까지 겁을 주니?”
“나 말이야..... 현화하고 아버지가 다르대....”
“크크크....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농담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내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내 생부는 따로 있다는 소리야....”
“야! 무슨 소설 쓰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의 침묵이 뭘 말하려는걸까.
“나도 최근에 알게된 사실이야.... 어쩜 너도 꼭 알아두어야만 할 것 같아서....”
우린 당연한 것처럼 가던 길을 되돌려서 가까운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근처에 커피숍이 눈에 띄질 않아서 그렇게 하긴 했지만 말로만 듣던 엄청난 가격의 커피를 시켜놓고 창가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늘어 놓아야만 하는걸까.
갑자기 다 잊어버리고 그와 마냥 행복한 얘기들만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심각해 있었다.
“갑자기 아무 얘기도 하지 싫어지네...”
“그러면 하지마! ”그의 눈속에 작은 물방울들이 반짝거리는 걸 보았다.
“아니! 지금 아니면 하기 힘들지도 몰라...”
나는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웨이트리스가 갖다 준 카푸치노를 한모금 입에 물고는 잠깐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고 앉아 있었다.
“힘들게 말하려고 하지마! 현희야! 니 마음이 가는데로 그렇게 해...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니가 말하기 싫을 정도로 그것이 아픈 얘기라면 안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카푸치노의 계피향을 맡으면서 천천히 나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생부에 대한 얘기는 엄마한테서 들었던 것도 제대로 정리가 안되는 상황이라서 그에게는 조폭이라고 얼렁뚱땅 넘겨 버리고 엄마와 준우엄마 사이에서 오고간 얘기들만 앞 뒤 정황을 섞어가면서 말해 주었다.
“우리 엄마한테는 새삼 터져 나온 옛날 얘기가 엄청난 충격일텐데 나는 그저 내 생각만 자꾸 하게 돼. 왜 과거 때문에 현재의 내가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사실은 그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너무 힘들어. 내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었던 일들 때문에 내가 너를 만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이 안돼.”
코끝이 찡해오는걸 간신히 참으면서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내게서 떠나질 못한다.
무어라 한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역시도 내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는지 막막해하는 눈치다.
눈앞에 보이는 내가 뱉어 내는 말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기가 막혀서일까.
그가 내 옆자리로 와서 내 어깨를 감싸 안을 때 까지도 그의 침묵이 주는 위엄은 내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고 그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오기 같은걸 부렸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그를 밀어 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내게는 그의 위안이 필요하다는 생각 또한 떨쳐버리질 못한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준우는 약간은 상기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조만간에 차한대 빼 준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 여행부터 가자. 지난번 말했던 것처럼 동해 한바퀴 돌고 오자.”
남자나이 겨우 스물 다섯, 아직도 그의 표정에선 가끔씩 티없는 천진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환경 탓일거라 너무도 쉽게 단정을 해버리고 나니까 쓸쓸한 생각이 들어버린다.

그와 헤어지자 마자 갑자기 내 소식에 기뻐할 엄마 생각이 나서 급한 마음에 단숨에 집으로 내달렸다. 엄마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낮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네시면 집에서 당연히 내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도무지 연락이 되질 않았었다.
저녁 아홉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 이제는 들어오셨겠지 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단 한점의 불빛도 보이지 않고 깊은 어둠만이 있었다.
엄마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집에 들린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여전히 깔끔한 엄마의 방,
정면으로 보이는 텔레비전 위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
곱슬머리에 두툼한 입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이지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엄마 말로는 코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코가 잘 생겨야 한다고 했는데 너희 아버지가 아마 코 때문에 그렇게 잘나 보이는거라고..... 현화하고 나하고 그 말 때문에 피식거리며 웃었던 적도 있는데 역시 잘나 보이는 얼굴이다.
큰아버지가 끄는 리어카에 실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날 쳐다보던 그 아버지,
나는 그 기억 이전의 기억을 해 내질 못한다.
욕심많은 내가 현화를 밀쳐 내고 엄마 젖 빨겠다고 떼쓰던 그 때가 네 다섯 살 쯤 되었다는데 기억은 나 위주로 생겨난 사건들에 대해서만 국한되어 있을 뿐 엄마는 아버지가 나를 땅에 내려놓지도 않고 예뻐했다고 말하는데 도무지 내 머릿속에 아버지는 불룩한 배를 끌어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누워 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 외에는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그리움 같은 걸 가져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진 속에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왈칵 치밀어 오르는 어떤 그리움이 주체할 수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