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희씨! 전화 안 받아요?”
“네?”
“지금 울리는 거 미스한 핸드폰 아니예요?”
“아, 네....”
“빨리 받아봐요..... ”
“아, 네.....”
“아니, 전화 받으라고요....”
그제서야 책상위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옹달샘벨소리가 숨가쁘게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동에다 맞추어 둘 껄’ 벨소리 중에서 게 중 나은거라고 생각하고 골라 놓은 곡인데도 들을 때마다 기계음이 별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했다.
짖궂은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무장을 피해서 아예 사무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여보세요?”
“한현희씨 핸드폰 맞습니까?”
“네...그런데요?”
“한현희씨! 나 정도흰데...”
“아! 교수님! 교수님이 어쩐 일로....”정도희교수는 내겐 아주 특별한 분이다.
우리 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아직 미혼이라는 것 말고도 전임강사이긴 하지만 열정이 있어서인지 학생들하고도 제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오던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야간 학생들은 나처럼 나이가 많거나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서인지 정도희교수는 선생으로서의 어떤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기쁜 소식 전해 줄려고.... 한현희씨 이번 국시, 패스했어요. 처음 들었죠?”
“발표는 내일이잖아요?”
“지금 막 명단이 도착했어요. 합격률이 야간에서는 너무도 저조해서 합격자 명단이 한눈에 들어 올 정도인데 그 중에 한현희씨 이름이 눈에 띠길래....”
“정말이세요. 기대도 안했는데....”
“내눈으로 확실히 본 거니까 백프로 사실이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한테도 이런 행운이 올 수도 있는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이런 행운이 내게 정말 와 주었단 말인가.
“왜 나보고 고맙다고 해요? 인사 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데....”“누구...?”“누구라니.... 한현희씨 애인말이지....”
준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정교수가 내게 처음 말을 걸어올 때도 준우 얘기로 시작했던 것 같다.
‘한현희씨 공부 열심히 해야겠던데요. 그렇게 지극정성이라면서요...'
지극정성? 교문앞에 늘 한결같이 서 있던 준우의 모습이 순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잠깐 망설이다 그가 기뻐할 걸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신호가 한참이나 간다 싶더니 늦게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야! 도서관이었나봐? ”
“으응. 왠일이니? 니가 먼저 전화를 다하고....”
여전히 깔끔한 말소리다.
“나 국시 합격 했대! ”
“뭐? 정말이야? 자신 없었다며? 순 내숭이었구나.”
“이건 순전히 운인 것 같애. 아주 간신히 턱걸이를 했을거야.”
“어쨌든.... 오늘 당장 만나자. 내가 축하해 줘야지. 누가 해주니?”
“글쎄.....”
“아무 소리 말어. 퇴근할 때 쯤 너 회사 앞으로 갈께.”
“....알았어.”
가슴이 새삼스럽게 두근거린다.
그를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음은 날 당혹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반란이었다.
그는 그 예전에 교문 앞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일층 로비를 막 지나 회전문 하나를 밀치는 순간 달려들 듯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가 먼저가 아니라 보기에도 섬뜻한 적색빛깔의 장미 한다발이 내 가슴으로 먼저 안겨 들었다. 그 향기에 잠깐 취했나 싶게 아주 잠깐은 넋이 나간 듯 했다. 거침없는 그의 행동들, 가끔씩 사정없이 날 허물어뜨리던 묘한 힘을 가진 그가 오늘은 아이처럼 장미 다발로 그 어색함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어두움은 벌써 내려앉은지 오래이고 거리는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설렁했다.
우리는 늘쌍 해 오던 것처럼 일단은 시내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이 저만큼 보이는데 갑자기 그가 택시 한대를 잡아 세운다.
잠깐 그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그다지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삼십분 가까이나 지나서야 그가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은 저녁이면 야경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런 한겨울 초저녁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처럼 날씨하고는 무관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어깨를 맞붙이고 달빛 따라 함께 출렁거리며 걷고들 있었다. 지난 가을에 우리가 이곳을 찾을 때만 해도 우리한테 이런 긴 침묵이 흐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으면서 우린 각자의 머릿속으로 나름대로의 원고를 쓰고 있었다.
먼저 긴 침묵을 깨고 입은 연 것은 나였다.
“고마워! 니가 아니었으면 오늘같은 이런 일들은 아마 꿈꾸기도 힘들었을꺼야.”“니한테 고맙다는 소리 듣고 싶어서 그렇게 한거 아니야, 괜히 서먹하니 그런 말부터 하냐? 안 춥니? 그 꽃 내가 들어 줄께, 손 시렵지 않어?” 내손에서 장미다발을 빼내어 가면서 나머지 한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늘 해 오던 대로 그가 잡은 내손은 준우 그의 포켓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손가락 하나 하나를 조물거리며 만지작 거리는 동안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