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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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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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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BY 마음 2002-04-22

내 눈을 맞추지 못하는 엄마의 얼굴을 무심히 쳐다보면서 내 속에 흐르는 다른 성질의 피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출생의 비밀을 다른 사람도 아닌 준우어머니가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
엄마는 한번 터져 버린 둑처럼 끝도 쏟아 내어 놓았다.
“그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이었어....
단지 하고 있는 입성이 누추했고 몰골 또한 형편 없었지만 그 사람한테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
처음엔 그 사람도 나라는 여자에 대해서 그저 죽으려고 하는 한사람 구해내어 보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는데 나를 자기 앞에다 앉혀 놓고 보니까 남달리 끌리는 데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그렇게 함께 살지는 않았어.....
그리고 홀몸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데에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고.... ”
그 때 갑작스런 전화벨 소리에 오히려 나보다도 엄마가 더 놀라는 눈치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네. 그런데요..... 그러니?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라...’
내게 수화기를 건네면서 준우전화라고 그 한마디만 하고는 이내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준우전화? 준우? 그가 누군인가?
그의 이름 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식탁가장자리를 힘주어 잡고 일어났다.
하지만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몇발자국 떼어 놓다가 나는 이내 주저 앉고 말았다.
엄마의 손이 내 겨드랑이 밑에서 느껴졌다.
순간 내 몸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어떤 괴력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놀란눈을 하고 있는 엄마의 입술이 뭐라고 달싹거리고 있었지만 내 귓속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내 손에 무언가가 들여져 있다. 전화기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것을 방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버렸다.
그 소리에 귀를 털어 막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내게 엄마가 다가왔다.
그리곤 내 얼굴을 감싸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가! 아가! 내아가! 나를 .....나를 이해해다오..... 나를 이해해다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하지만 더 이상 널 속일수는 없었어.... 사랑해... 사랑해..... 오오우..... 내 아가..... 넌 내 목숨이야.”
“엄.............마............”
부둥켜 안고 우린 울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느닷없이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런 늦은 저녁에 누굴까 하고 있는데 준우의 목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현희야! 현희어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문 좀 열어 주세요...”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른척 내 버려 둘 수가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현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준우는 그 사이에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엄마는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남은 것은 거실바닥에 나둥그러져 있던 전화기였다.
파편조각이 조금 눈에 띄었을 뿐 전화기는 멀쩡하게 보였다.
“무슨 일이니?”
“............”
“어머닌?”
“방에 계셔....... 들어오지 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줘!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어.....”
“괜찮니? 여기까지 왔는데 어머니 좀 만나뵈면 안될까?”
“오늘은 안된다니까...... 그냥 가줘, 제발.....”
“잠깐 얘기 좀 해....”

그를 따라서 골목길을 빠져나오다가 그에게서 제법 진한 알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너도 술 먹었니?”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차가운 기운이 깔여 있다.
“너도 먹었다는 소리네.... 집에 무슨 일 있는거야?”
“................”
“왜 엄마하고 싸웠니?”
“엄마하고 싸워? 흐흐흐...... 그래..... 싸웠어..... 왜 날 낳았냐고.....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냐고.....”가슴뿐만 아니라 배거죽까지 당겨왔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휘감으며 죄어 온다.
그의 온기가 느껴져 오는데 마음은 왠지 낯설고 서먹하다.
“이번 주말에 가까운 바다라도 다녀오자.... 알았지? 아무튼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애....”
“봐서.... 그 얘기 할려고 여기까지 끌고 나왔니?”
혀끝에서 똑떨어져 나오는 말들은 그대로 굴러 갈 것만 같았다.
“너 나한테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나 만나서 풀어 나갈려고 해야지.... 자꾸 피하기만 한다고 능수는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견딜 수가 없어.... 너를 내 버려둘 수가 없단 말이다.” 준우의 말 하나하나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바다를 가든 산을 가든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만 돌아가! 나 그만 들어갈래!”
한길가에 그를 세워두고 다시 집쪽으로 걸음을 떼 놓았다.
나를 마냥 이해해 주기만 바라는 내 이기심이 얼마나 그를 당혹스럽게 할까. 묵묵히 나를 지켜보고 있을 그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내 의지가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이미 현실감은 없어진 상태였다. 그가 어디쯤에서 되돌아 갔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집에 없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순간 급한 마음에 무작정 밖으로 뛰어 나왔다.
코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뿐 숨소리조차 이 작은 골목안에서는 커다란 소음으로 들렸다.
저만치에서 한 여자가 골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다.
간간히 바람소리가지 을씨년스럽게 들리는 이밤에 코트도 입지 않고 집에서 입고 있던 가디건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는 여자는 여자라기 보다는 누구에게나 어머니 소릴 들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당당한 위풍이 있었다.
그 엄마의 손에 술병일거라는 짐작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검정비닐이 들리어져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최후의 만찬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하게 했다.
그래..... 어차피 쏟아놓은 것들이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지 엄마는 오늘밤을 그냥 넘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검정비닐을 받아지면서 엄마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감아쥔 내 손을 엄마가 다시 잡았다.
“엄마!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아니다.... 니가 날 후려친데도 난 니 하는데로 내 버려 뒀을거다.”엄마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때였다.
“뭐하는거야.... 나 빼 놓고......”
저 멀리서 현화가 뛰어오면서 소릴쳤다.
내 동생 현화가 아르바이트를 지금까지 하고 막 퇴근해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현화도 있었지......... 우리 식구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