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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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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BY 마음 2002-03-15

내가 엄마의 잔에 먼저 소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니까 꼭 친구 같네.....히히....”
“그래? 그럼 친구하자.....”
다시 내 잔을 채우던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는 한 모금씩 그것을 삼키면서 서로 다른 생각에 바져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주가 두 잔쯤 비워져 갈 쯤에 엄마는 느닷없이 날 정현희라고 부른다.
혼자 웅얼거리는 듯한 말이어서 잘못 들었나 했었다.
근데 다시 정현희 이 이름이 내 진짜 이름이라고, 그것도 아무 표정도 없이 말하고 있었다.
“넌 한현희가 아니라 정현희야.... 네 아버지가 정씨였다......휴.................”
긴한숨을 뒤이어 토해 놓는다.
“이 세상에서 너의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화아버지 말고는 딱
한사람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그 사람이 바로 준우 엄마야.....
덕산에서 살 때 준우엄마가 우리집에 온 것은 순전히 날 전도하기 위해서였지....
그 당시에는 어느 누가 봐도 우리집 사정이 기가 막혔을 테니까.... 단칸방에서 병든 남편에다 너희들까지....
내가 처음 식당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준우엄마 덕분이었다. 덕분에 어찌하였던 너희들 굶기지 않고 살아나올 수 있게 도와 준 것도 전부 그 사람이 한 일이야.
그래서 그랬었는지 나는 무슨 의무감처럼 내 속 얘기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래..... 내 전부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내가 그렇게라도 말해버릴 수 있었기에 그 당시 날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방법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준우엄마 따라 교회도 다녔었어.....
너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준우네 이사가고 나니까 그나마 그 일도 못하겠더구나....
준우엄마는 정말 내게는 특별한 사람이었어.....
나이는 나보다 더 어렸지만 생각하는 것이 깊이가 있는데다가 믿을만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다시 생기더구나....
다른 건 몰라도 너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면 뭐하겠니? 이미 엎질려진 물인걸....
너의 아버지란 사람,
너도 보긴 했을거다. 내 등에 그려진 그림..........
그거 그려준 사람이지.....후후후.........”
엄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내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사람마냥 히죽거리기도 했다가 양미간을 좁혀서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참기 어려운 메스꺼움이 목젖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께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가 있다.
천천히 아래로 쓸어내려본다.......
하지만 그건 쉽게 진정이 될 것 같지 않은데 난 엄마의 눈 밖으로 밀쳐져 있는지 얘기는 계속되었다.
“내가 여고를 졸업하고 너처럼 조그마한 무역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전 직원 회식 때문에 다같이 나이트크럽이란데를 갔었어.
한데 거기서 다른 테이블의 누군가가 계속 해서 날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았어.
언뜻 보기에도 불량끼가 있어 보이는 것이 갑자기 겁이 나서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느닷없이 내게 손을 내미는거야.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대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지...
한데 이 남자, 내게 거절 당하고 난 뒤로도 여전히 추근거린다 싶더니 기어이 내 뒤를 캐내어 우리집까지 알아낸거야.
난 그저 무섭기만 했었다.
원래 겁이 많았던터라 더 그랬지....
그 사람을 알게 된지 거진 한달 쯤 되던 날이었는데 평소처럼 또 그 길목을 지키고 있더구나.
그래서 그날도 늘 하던대로 매몰차게 그 사람을 외면해 버리고 막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내 손목을 낚아채어서 어리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어.
그건 이미 그 사람이 계획해 놓은 일이었어.
골목 하나를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검정색 승용차한대가 대기 중이었어.
나는 꼼짝없이 그 사람 손아귀에 걸리고 만거야....꼼짝없이.....
그렇게 해서 떠난 친정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 보질 못했다..... 그 사람의 집요함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로는 다 못해.
온갖 협박 속에서 그저 나 하나로 끝나길 바랬을 뿐이야....
우리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했다가 도망치다 잡히면 갈아마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3년을 보냈어.....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고 난 제대로 된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지....
그렇게 반은 미치갱이처럼 하고 살고 있는데 덜컥 네가 생긴거야.
흣..... 기가 차더라...
난 내가 너를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 못했어...
그저 내 고통만 생각했지, 그런데 니가 내 몸속에 있다는 게,
그리고 네가 그 사람하고 나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걸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어....
난 널 지우려고 마음 먹었지.
하지만 널 지우는 일은 결국 나까지 함께 죽겠다는 각오를 하게 하더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친정집이라고 문 앞까지라도 가보자 싶어서 갔었는데 이미 그 집은 우리집이 아니었어.
다른 사람의 문패가 달려 있는거야......
그래서 기억 더듬어 고모네에다 전화를 넣어봤더니 내가 가출한 걸로 알고 있었다는구나.....
거기다가 그 인간이 우리집에다 나 대신 하는 거라며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받다보니 어쩌지를 못하고 이사를 한 모양이야.....
처음엔 그 인간부터 죽이고 난 뒤에 죽든지 해야겠다 싶더니 무슨 마음인지 그리는 못하겠더라....
누군가를 죽인다는 일은 왠만한 용기없이는 할 수 가 없는 일이었어.....
그러고보면 나처럼 마음 여린 사람이 또 어디있나 싶다....”
이미 소주 한병이 비워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한테서 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잠깐 잠깐씩 입을 축이는 청량음료처럼 잔을 비우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안중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