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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동물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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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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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BY 마음 2002-03-08

심장이 요동을 쳐 댄다.
지난번 큰엄마가 내게 한 말들이 순간 떠올랐다.
‘네 엄마 그런 사실 알고 나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수습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엄마! 아니야, 준우하고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마! 엄마! 나 엄마 뿐이야, 정말이야, 아무도 필요 없어! 엄마만 있으면 돼! ”
“현화말이 사실이구나! 준우 엄마가 반대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엄마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우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어차피 난 준우하고 결혼 같은거 할 생각, 꿈에도 해 본적이 없으니까..........”
“준우엄마가 너보고 뭐라고 하더냐? 니가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라서 싫다고 하더냐? 아니면 니가 준우보다 덜 배워서 싫다고 하더냐?”
“...................”
“내가 알고 있는 준우엄마란 사람은 그러한 것 가지고 트집 잡을 사람은 아닐게다. 그렇지?”
“...............”
“내가 더러운 년이라서.... 그래서 그렇다고.... 분명히 그랬을거야. 내 말이 맞지?”
“그만해, 엄마! ”
엄마는 천장을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하.......현희야! 누가 너에게 준우를 보내 주었다니? 어떻게 이렇게 까지 날 따라다닐수가 있는지..... ” 엄마는 당신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다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엄마의 등 뒤로 가서 그런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나 괜찮아........ 다 이해할 수 있어. 나도 현화도 이제 다 컸잖아...... 엄마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엄마는 엄마야,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린 엄마편이야...”
진심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거라 믿고 있었다.

“현희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너한테 이렇게 까지 고통을 주다니..... 너한테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지 모르겠구나.”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꼭 내게 다 말해야 할 필요는 없어..... 이제 다 접어 버릴꺼야.... 그래, 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엄마가 우리한테 했던 말 아직도 기억이 나! 난 이제부터 다시 태어날꺼야, 너희들 때문이라도......했었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도 엄마가 우리를 꼭 안아주던 것 때문에 그저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애. 그렇게 다시 시작해, 엄마! ”
다시 엄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니가 나보다 낫구나. ”
한참동안 침묵이 흘렸다.
현화 들어올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다 한마디 불쑥 내어 놓았다.
“내일 준우엄마 만나서 이야기는 좀 해봐야겠다.”
“그럴 필요없어!”
“나한테 맡겨 둬! 걱정하지 말고.....”
“그럴 필요 없다니까... 엄마가 뭐라고 말할건데....? 그러지마! 엄마 그러는 거 싫어....”
“알았어....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준우엄마가 지금 병원에 있다는 말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머릿속은 깨어질 듯이 아파온다.
엄마가 알게 된 것이 현화 때문이라지만 현화를 굳이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화 역시 준우와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어서 제 딴에는 내 생각한다고 한 말일게다.
나 하나 마음만 다 잡으면 아무 일도 아닐 것만 같은데 그래도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은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다.

엄마의 침묵은 장시간 계속 되었다.
불안한 마음에 현화한테 넌지시 엄마의 동태를 물어보기도 하고 눈치를 보고는 하지만 엄마한테 특별히 달라져 보이는 것은 없었다.
준우네 집에 파출부 일이 틀어지면서 엄마는 오히려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 두려움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점점 엄마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엄마만의 공간에서 소외되거나 무기력해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내 문제까지 생기면서 겉으로 표시할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릴거라는 추측을 진작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불안해 보인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 엄마가 나를 따로 불러다 앉힌 것은 그 일이 있고 일 주일이나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현화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늦은 밤에나 들어올테고 엄마와 단 둘이 저녁을 먹은 뒤 무언가 단단히 준비를 하신 눈치다.
소주 한병이 식탁위에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저녁반찬으로 나온 김치찌개에다 밑반찬이었던 땅콩조림이 전부이지만 술상이라고 차린 식탁 앞에다 날 불려 들였다.
넌 맥주가 낫겠다 하시면서 병맥주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집어 내 놓는다.
이렇게 술자리를 엄마하고 가져본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의식적으로 엄마는 그런 분위기를 피해 왔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요사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 또 다시 냉장고를 뒤지더니 마요네즈에다 오이며 상추며 있는 야채들을 죄다 넣어 버무린 샐러드를 식탁 위에 올려다 놓는다. 나를 위한 것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엄마와 마주 앉은 술자리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긴장감을 가져왔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연신 히죽거리며 웃었다.
“우리 딸하고 오늘 잔뜩 취해보고 싶어서..... 그래서.....”
엄마의 눈이 찬찬히 날 훑어보고 있었다.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콧날, 깊은 주름이 이미 젊음을 비켜 앉은 눈매이지만 반달 눈위로 그리 크지 않은 쌍꺼풀, 아직도 하얀 피부, 그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한때 엄마가 누렸을 젊음을 상상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