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냥 해 보는 소리 아니야. 너도 날 조금은 알고 있겠지만 한다면 해, 어떤 일이 있어도.....”그는 잠시 말을 끊는다. 그리곤 내 한쪽 손을 꼭 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나마 너라도 그런 식으로 말해 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하지만 내가 자신이 없어’ 이럴 땐 영화속에선 분명 사랑의 승리로 끝나기도 하겠지만 준우와 결혼문제 만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한다.
“나만 믿어, 엄마한테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만하면 내 뜻대로 해 주실꺼야. 그러니까 너 제발 마음에도 없는 말 같은 걸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너는 그러고 나면 속이 좀 풀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 때문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아.”
“.............”
“말 좀 해라! 정말 미치겠다.....”
‘나도 답답해 죽겠어. 너만 그런게 아니라, 나도 미치겠다고..... 너하고 헤어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만 같애, 정말 나도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야..... 어른들 이야기인데다가 무엇보다 우리엄마한테는 일언방구 말한디 해 볼 수가 없으니.....’
“얘기하기가 곤란한 거라면 안해도 괜찮아!”
내 머리칼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이 잠깐 멈추더니 사랑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듯하고는 가볍게 입맞춤을 한다.
그의 부드러움이 내 머리카락 한올 한올 사이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내 속에서도 사랑해 사랑해를 수도 없이 그려놓고 있는데도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한다.
주인집 대문 옆에다 쪽문으로 따로 만들어진 우리집 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면 현관문과 불과 서너발자국거리였다.
열쇠를 제각각 가지고 있었던 터라 이렇게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누굴 깨울 필요는 없었다.
현화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방에만 불이 켜져 있는데, 순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토해져 나온다.
엄마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벌써 주무시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미닫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여전히 엄마는 꿈쩍도 않는다.
텔레비전도 꺼져있고 11시가 다 된 시간이라 주무시나 보다 하고 나오려는데 작은 흐느낌이 엄마한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응?”엉겁결에 달려들어 엄마를 흔들어 본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린채 꿈쩍도 않는다.
순간 하루 종일 엄마를 외면해 버린 나 자신의 잘못이 떠올랐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엄마가 이해를 좀 해줘! 처음부터 자신은 없었지만 혹시나 했었는데....... 그래서 엄마 볼 낯도 없고 나 자신한테도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서 친구 만나서 술 한잔 한거야....”
하지만 내 얘기를 듣고도 엄마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왜 그래. 정말? 으응?”
말은 하지만 엄마를 억지로 되돌려 눕히지는 못했다.
“현희야! 괜찮아...... 나 괜찮으니까 니 방에 가봐. ”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늘게 떨려 나와서 나까지도 떨리는 것 같다.
“일어나 봐, 엄마! 무슨 일 있는거야? 요사이 이상해졌어....... 왜, 집에만 있어서 그래? 말 좀 해 봐. 답답해 죽겠어............”
내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더니 나중에 악을 써대고 있었다.
“난 니한테....정말,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니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어미가 되어가지고 자식 공부 하나 제대로 못시키는..... 그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
엄마의 울음섞인 말은 지금껏 우리 가족이 살아나올 수 있게 한 엄마의 강인함하고는 사뭇 다른, 너무도 여리디 여린 한 여자의 피울음처럼 듣겼다.
내 마음에 이미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뚫려져 있어서 어디가 안인지 밖인지를 구분이 안 갈 만큼 추워오기 시작한다.
동그랗게 어깨를 말아쥐고 옆으로 돌려 누운 엄마한테서 그저 느껴지는 것은 불쌍한 여자의 모습 뿐이었다.
‘엄마! 나, 나 말이야. 준우 없이는 안 되겠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내가 이러면 안된다고 하면서도 준우, 그 사람 없이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은데....나 어떻하면 좋아. 엄마가 나 좀 도와줘야 하는데..... 엄마가 먼저 이러고 나오면 나는 어떻하라고.....’엄마의 어깨 하나를 부여잡고 나까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의 손 하나를 빼내어 내 손을 잡아주었지만 여전히 날 쳐다보지를 않는다.
“현희야, 네 방으로 가거라..... 미안하다. 오늘은 나 혼자 있고 싶구나....”
엄마한테 떠 밀려서 밖으로 나왔지만 오늘 같은 날, 엄마 혼자 두기에는 왠지 불안하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분명 무슨 다른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내 얘기만 하신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데 방에 누워 계셨던 엄마가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엄마! 커피 마실까?” 왠지 서먹한 느낌이 들어 분위기를 띄워본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또 다시 반복해서 다시 물어보았을 때 엄마는 그 대답 대신에 알아 듣기에도 어려운 작은 소리로 “우리 죽으까 ?”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말이 아니라 잠꼬대 같은 것이었다.
몽유병환자처럼 하고 앉아서 멍하니 공중에 떠 있던 그 시선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회오리 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는 불안감을 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엄마를 마주보고 앉았다.
“우리 죽어 버릴까?”
여전히 엄마는 내 눈을 맞추질 못하신다.
“왜? 왜 그러는데 엄마! 응? 왜 그래?”
두팔을 쭉 뻗어 엄마의 넋나간 얼굴을 흔들었다.
“현화한테 다 들었다.”
“뭘?”
“준우하고 사귄다는 얘기....” 그제서야 내눈을 들여다 보았다.
동시에 나는 엄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려지더니 가득 고여진 눈물을 떨구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