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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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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마음 2001-12-31

마치 작열하는 태양을 안고 드러누워 있는 것만 같다.
눈을 뜨기가 힘겹다.
갈증에 목젖이 다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물! 물!”
“정신이 나니? ”준우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까이 들려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내 곁에 있다. 내게 처음으로 사랑의 떨림을 가르쳐 준 그 사람, 그가 처음 내게 했던 말처럼, 날 만지고 싶다는 그 말처럼 나 역시 그의 냄새가 맡고 싶었다.
어쩌다 스치듯 느껴져온 그의 냄새, 그가 날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은 오히려 내 속의 내가 말하지 못했던 고백이어서 날 부끄럽게 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엄마와 내가 한때 할머니에게 온갖 수모를 다 겪어가며 살아 버틴 그 시골 동네에서 함께 학교를 다녔던, 정말 이젠 다 잊혀져 버릴 수도 있는 우리 가족의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그는 자세한 내막을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엄마는 아닐 것이다.
분명 그의 엄마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고민 거리였지만 실제 그의 엄마를 만나보고 나니까 자신감은 고사하고 내 모습이 더 없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만 생겼다.

여기가 어디인가? 이 낯설은 냄새...병원? 그런데 왜 눈이 떠지지가 않지? 형광불빛이 너무도 강해서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내 손을 들어 눈을 비벼 보러 했지만 내 오른쪽 팔에 무언가가 치렁치렁하니 달려 있다.
링게르 주사를 달고 있는게 아닌가...
“현희야! 물, 여기 있어. ”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떨고 있던지... 다시 내 눈에 이슬부터 맺히는 듯 했다.
그의 한쪽 팔이 내 목 뒤로 밀고 들어온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주루룩 타고 내렸다.
“울지 마! 니가 왜 우니? 니가 왜 울어? 아무도 널 울릴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그는 몇 시간 전 전화로 내게 말해오던 그 강한 어조로 내 마음을 쓰다듬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에도 역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팔을 빼내어 내 얼굴에 흘려 내린 눈물부터 닦아낸다.
그러는 동안도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일단, 물부터 좀 먹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곤 조용히 그가 소곤거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넌 늘 나 앞에서 강한 척, 안 그런 척 하더니... 이 참에 며칠만이라도 좀 쉬어라.”
그의 손이 내 머릿칼을 빗어 주고 있었다.
힘겹게 다시 눈을 뜨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우의 얼굴에서 그의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 보인다.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날카로운 선이 주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자그마한 얼굴, 두드려져 나온 날카로운 콧날, 그리 크지 않은 눈, 가끔씩 그를 보면 탈랜트 이재룡을 연상시켰던 얼굴이다.
“지금 몇시나 되었어?”
“얼마 안 됐어. 우리집에는 내가 전화 해 뒀으니까 괜찮은데 너희 집이 걱정이다. 어머니 걱정 많이 하실텐데...”
“여기가 어느 병원이야?”
“자혜병원,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니가 업고 왔니?”
“이제야 정신이 좀 나나보다. 그래, 그럼 어떻허니? 너희집이 코 앞에 있어도 내가 널 업고 들어갈 수도 없고...무엇보다 금방 안 깨어나서 무조건 업고 뛰었지.”
그가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너무 천진해 보여서 속이 상하다.
그에게 왜 이런 힘든 아픔을 주는가,
“일단 우리집으로 전화 좀 해 줘, 병원만 좀 가르쳐 주고... 내가 다 말 할테니까 넌 빠져. 알았지? 넌 절대 나서면 안돼! 그리고 의료보험증 좀 가지고 오라고 하고...”
“왜? 나 보고 가라고? 나 천천히 가도 돼! ”
“내말 들어!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 엄마한테 나도 할말이 있어야 되잖아.”
“그 와중에도 챙길건 다 챙기는 거 봐라. 그래 알았다. 전화해 주고 갈테니까. 이 주사나 맞고 가. 혈압도 많이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제 괜찮은지 모르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근처에 있는 간호사를 불려다 기어이 내 팔에 혈압계의 퍼프를 감게 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간호사는 이젠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원래 혈압이 좀 낮은 편인가 봐요. 하면서 가버린다.

그가 집으로 돌아간 뒤 채 5분 안 되어 엄마의 모습이 설핏 비쳤다.
엄마의 얼굴이 여간 고통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간호사실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엄마를 발견한 순간 또 한번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엄마! 엄마! 여러번 엄마를 불렸건만 그 소리를 못 들었는지 간호사실에 고개를 들이밀고 묻고 있나 보다.
엄마의 모습이 왜 이리 초라하게 보이는 걸까?
낮에 본 준우 엄마와는 비교가 안 되는 차림새다. 앞이 막힌 겨울용 슬리퍼에 사구려 티가 나는 검정색 골덴바지에 벌써 오년도 더 된 겨울 코트를 걸친 우리 엄마, 오늘도 어김없이 샤워를 하고 머리까지 감고는 맨 몸뚱아리만 엄마의 방에 들어 갔을 것이다. 단 한번도 그것을 어겨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같은 날이라고 별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