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이사를 했는데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짐들은 지친 나를 더욱 피곤하게한다. 대충 정리된 주방에서 작은 주전자와 커피를 찾아냈다. 설탕도 찾았지만 프림은 어디있는지 도통 찾을수가 없어 그냥 마시기로 했다. 물이 끓는 사이 먼지가 도톰하게 쌓인 베란다로 나가 앉았다. 낮엔 차들이 제법 많이 다녀 시끄러울줄 알았는데 앞뒤로 훤하게 뚫린 썰렁하다 못해 추위를 느끼게 하는 배경들에 비해 차들의 불빛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것을 보며 어떤 생명이 위태로움에 빠졌는지 그 긴박함이 소리만큼이나 커다랗게 다가온다. 주홍 불빛아래 커피물이 끓고 있다. 그는 늘 "커피물은 오래 끓여야해. 그래야만 커피의 잔인함과 프림의 달콤함을 제대로 느낄수 있거든..."이라고 말했다. 커피가 잔인한 맛을 가지고 있다고... 역시 그 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 사람 생각은 하지말아야지 하며 쓴 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피곤으로 인해 다리는 아프고 머리는 어젯밤부터 정으로 쪼는것처럼 딱딱거렸다. 침대 커버만 씌운뒤 뜨거운 물에 씻고 내일은 늦게까지 호사스런 잠을 자야겠다고 맘을 먹어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모두들 너무 일찍 이혼한게 아니냐고 걱정스러워 했다. 좀 더 신중했어도 시간은 충분했다고 아니, 어쩜 그 일은 별게 아닐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든 남자들이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이라고 그것땜에 나처럼 이혼을 했다면 멀쩡히 잘 사는 부부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고.. 그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남자들이 사랑을 한다고 해도 그건 스쳐가는 바람이며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지는거라고 나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난 단호히 이혼을 선택했고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이지만 갑자기 주어진 혼자라는 생이 혼란스럽지만은 않았다. 말없이 오랫동안 고민했다가 내린 결정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편이었던 그도 처음엔 무척이나 당황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내 단호함에 이내 수긍을했다. 정말 그와 난 깔끔하게 헤어졌다. 그와 같이 지낸 2년이라는 시간동안 전업주부 였으므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당장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살길이 막막했지만 위자료라는 명분으로 그가 내게 이사온 23평 아파트의 전세금과 더불어 5천만원이라는 돈을 주었다. 많다거나 적다고 생각해본적 없었다. 다만 잠깐 동안은 쉴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고 그와 관련된 돈이라고도 생각해본적 없었다. 암튼 난 이제 젊은 이혼녀일뿐이다. 이혼을 하고나니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것 같았다. 하루종일 집에서 그를 원망하고 살길을 고민하고 갈등하던 시간에 비하면 정말이지 홀가분한 것이었다. 잠도 오늘 밤엔 잘 올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