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708

[제22회]


BY 마음 2001-11-29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희뿌연 하늘을 올려 다 보면서 윤미가 내게 말했다.
“겨울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 내일이 토요일이잖아. 내일 가지 뭐!”
“아니! 지금 당장 보고 싶어!”
“지금 당장?”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리고는 웃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둘은 그렇게 서로의 근무지로 향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기 시작했다.
겨울바다가 아닌 봄햇살을 가득 안은 은빛 봄바다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윤미와 나도 이젠 여느 사람들처럼 그렇게 정신없는 생활 속에 익숙해져 갔고 나는 봄과 더불어 보건소 자체 행사였던 가족계획 캠페인으로 시가 행진을 해야 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피킷걸이 되어 제일 선두에 서서 관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온 읍내를 내 얼굴을 다 드러내 놓고 다닌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윤미하고 나는 그런 내꼴에 대해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그렇게 봄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바닷가 작은 읍내에서 우리는 우리의 우정을 사랑이라 감히 말하면서 그렇게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다.

미스리가 살고 있다는 아파트 입구에서 미스리가 잠깐 자신의 손으로 내 손에 들린 쥬스병을 받아질려고 하다가 섬칫 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겸연쩍게 슬쩍히 보면서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젠 조금은 숙녀티가 나고 눈가로 번져 있는 눈화장도 제법 완숙해지는 듯 했다.
“이젠 그림은 안 그리니?”
여전히 내 눈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질 못했다.
“그림? 무슨 그림? 다 한때이지... 내가 그림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는 그림에 대한 얘기는 한번도 안했잖아. 너 그림, 지난번에 우연히 한번 봤는데 그쪽으로 계속 공부를 하지 그랬어.”
사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우리 언제 그런 얘기 할 기회나 있었니?”
“하긴...”
우리가 그녀의 방까지 들어 왔을때 나는 그녀의 방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방한쪽 구석에 늘여 놓은 고량주 빈병들이 즐비하니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 물었다.
그녀는 어색한 듯이 내게 말한다.
“차를 마실래. 아니면 담배를 줄까?”
나는 사실은 담배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
“나는 원래 커피 같은 건 잘 안 먹어서...”
그러면서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홍차였다.
붉은 빛깔의 홍차 향이 좋았다.

햇살이 잘 드는 방이었다.
여전히 어수선 했고 귤냄새 같은 향도 여전했다.
갑자기 웃음이 픽 새어 나온다.
그녀는 내가 왜 웃는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
“나 여전하지...”
“술 저렇게 먹고도 니가 견디는게 용하다.”
“조금은 나도 힘들어. 그래서 지금은 나도 자제하고 있어.”
“그림얘기 아까 하다 말았잖아. 계속 해봐.”
그녀는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꼬았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에서 활동을 했었어. 그 땐 정말이지 그림 밖에 안 그렀지. 아니 고등학교 때라기 보다 나는 늘 그림이 내 생활의 일부분처럼 계속 되었었어. 교회를 나가기 전 까지는...
처음엔 친구 따라 호기심으로 갔던 게 나를 완전히 바꿔 놓았어.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었지.
인근 교회에 부흥회까지 모두 다 찾아 다녔어.
목이 쉬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 했었다.
난 내가 싫었거든,
하지만 그것도 내겐 잠깐이었어, 금방 내가 지금 뭘하고 있나 싶었으니까,
그림을 배워 미술반 활동이라고 했지만 미대는 내게 그저 환상일 뿐이었어.”
그녀는 담배 한 개피를 내다 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긴 한숨을 담배 연기와 함께 내 뿜고 있었다.

“넌 우리집, 그러니까 영주 우리집이 말이야 어떨거라고 생각하니?”
“.....”
“지금 우리집 남의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면 믿겠니?”
그녀의 말은 지난번 영주 그녀의 집에 전화 했을때 이미 어느 정도 짐작했던 거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그 근처에서 알아 주는 알부자였지.
나는 한번도 돈을 들고 가서 과자를 사 먹은 적이 없었어.
가게에 아예 우리 엄마가 내걸로 장부까지 하나 만들어 둘 정도였으니까.
아쉬울게 없이 그저 말만 하면 다 사주셨던 부모님이었지.
그래서 난 아직도 내가 스스로 뭘 한다는 것이 서툴러.”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보다 그녀의 손톱에 발라져 있는 무색 메니큐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잘 다듬어진 긴 손톱이다.
그녀의 손만 봐도 얼마나 유복하게 컸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맏딸이었던 나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대접을 받으면서 그렇게 자랐을 거라는걸 내 진작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