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리는 나스타샤킨스키를 닮았다는 그 눈으로 나를 노려 보기 시작했다.
“넌 정말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모질게 대하는지 모른단 말이니?”
내 말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내 자존심이었다.
“알아!”
그녀의 대답에 힘이 실려 있었다.
“안다고? 그래,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우습지. 안그러니?”
“그러한 말들을 너는 그렇게 입으로 내?b어 가면서 사니?”
“무슨 말이야?”
“그날, 너 분명히 그날 밤 얘기를 할려고 하나 본데, 너 스스로 잘 생각해 봐. 네가 지금와서 그때 일 꺼집어 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니니?”
“......”
나는 순간 말이 막혀 버렸다. 그녀의 말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때가 언제적 얘기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하지만 난 그 후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내가 다시 쏘아 붙였다.
“넌 나를 아주 우스운 아이로 만들었단 말이야. 알겠니? 어쩌다 너 같은 아이와 한방을 쓰게 되었는지... 내 생애 씻을 수 없는 오명이 될거야.”
기어이 나는 그녀를 말로서 격타를 시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오히려 말을 닫아 버리고 긴 담배연기만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 담배 연기속에 나는 그날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손이 내 젖가슴을 만지던 그 기억이...
지금이라도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데...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완강하게 그녀를 내쳤어야 했었어.
하지만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지나간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녀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무말이 없는 그녀를 다시 쳐다 볼 때였다.
“난 그날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가 술에 취해 있던 그날,,니가 내 얼굴을 수건으로 닦이던 그날 말이야. 난 이미 니가 어떤 아이라는 걸 알았어.”
나는 떨고 있었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넌 분명히 그걸 원하고 있었어. 너는 아닐지 몰라도 니 몸은 그걸 원하고 있었단 말이야. 내말이 틀렸니?”
그녀의 목소리에 주저함이 없었다.
“너어어 너 같은 아이는 세상에 본 적도 없어. 어떻게 ...”
내 목소리는 말을 잇기에도 힘들만큼 온몸이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나도 어찌 할 수 없는 내 심박동 소리를 분명히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밤새 거의 한숨도 못 자고 온몸을 그저 덜덜덜 떨기만 했다.
온몸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밤새 그 생각만 했는데도 달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녁까지도 나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 잠만 잤다.
김양이 병문안으로 잠깐 다녀갔지만 미스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엔 어떻게 알았는지 윤미까지 찾아 왔다.
김밥에다 만두까지 사들고 찾아와서는 왠만하면 나가자고 자꾸 조른다.
그녀는 내가 자기 때문에 그러고 누워 있는 걸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다른 변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미스리 때문이지만 윤미, 그녀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변해 가는 윤미를 보고 있자니 내 속은 그 만큼 더 허전해 지는 걸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미희야. 너 이러고 누워 있는 거 정말 마음 아파서 못 보겠다. 우리 ‘나드리’ 가서 칵테일이나 한잔 마시고 그러고 오자.”
그녀는 기어이 나를 일으켜 세워서 외투를 걸치게 했다.
밖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것 같더니...
여전히 나드리 여주인은 그 모습 그대로 그 표정 그대로 우리를 반겼다.
윤미하고도 벌써 여러 차례 드나들던 곳이어서 그 여주인은 우리가 갈 때마다 서비스라며 이것저것들을 더 챙겨 주곤 했다.
마티니, 파라다이스, 핑크레이디, 골고루 맛을 봐 가며 한잔씩 시켜 놓고는 그것들을 음미하던 우리가 오늘도 역시 똑 같은 것들을 시켰다.
어느새 지난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윤미만 쳐다보고 있다.
“내말 많이 서운했었니?”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널 그렇게 서운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다만, 미희야!
난 말이지 니가 나로 하여금 힘들어질까봐 사실은 그게 겁이 나.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무튼 넌 지금의 니 모습이 훨씬 이쁘고 사랑스러워. 나 때문에 니가 나쁜 영향이라도 받을까봐 정말 그렇게 될까봐 걱정스러운거야.”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낀다.
그리고 무언가 얘기 할 듯 말 듯한 얘기를 머뭇거리더니 거듭 지금의 내 모습이 보기가 좋다고만 한다.
“난 니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그녀에게서 어쩜 로뎅의 연인 까미유끌로델을 연상시키는지 모른다.
격정의 몸부림, 그 열정,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살라 말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유치원선생님으로 안주해 버린다면 아마 나는 그녀를 버릴 것이다.
아니 다른 교회 여회원처럼 그렇게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경계하면서 그렇게 대할 것이다.
너는 괴테처럼 고민하고 그러한 모습이 더 어울린단 말이야.
화실에 틀어박혀 며칠째 햇빛도 안보고 쾡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그녀와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은,
내가 이렇게 너를 내 곁에 두려는 이유가 이러하다면 넌 분명, 어제처럼 그런 말을 할 것이다.
아니 그 보다도 더 화가 나 나를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너를 사랑해.
너를 너무 너무 사랑한단 말이다.
나는 어느새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색색들이 제 색깔을 만들고 있는 칵테일,
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자신들만의 맛을, 그리고 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니니?
그녀의 손수건이 어느새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뒤이어 내게 속삭이듯이 말한다.
“난 어쩜 너 보다도 훨씬 그런 걸 원하고 있는지 몰라. 하지만 이제 다시 그런...”
그녀 역시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미희야! 내 말 서운하다고 생각지 말고 잘 들어. 넌 어떤 꿈을 꾸고 있어. 그건 현실하고는 아주 동 떨어진 꿈, 나한테도 부모가 있고 너한테도 역시 니 세상이라는게 따로 있는거야.
니가 내가 될 수가 없고 내가 역시 너로 살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해.
난 다시 옛날로 돌아 가고 싶지 않아, 정말이야.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