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롱잔치가 끝나고 나는 곧바로 무대 뒤로 윤미를 찾아갔다.
난장판인 무대 뒤편엔 어느새 엄마들 까지 들어와 자기 아이들 챙기기에 나섰다.
겨울 외투를 찾아 입히고 제각기 그 곳을 빠져 나간 뒤 엉망진창이 된 그곳을 치우고 있는 윤미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설렁한 바람으로 들어차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난 왜 이리 쓸쓸하기만 한지...
그때였다. 그녀를 도와 대강 짐들을 챙기고 차로 실어 나를 것들을 한쪽으로 모우고 있는데 원장이 날 불렸다.
함께 뒤풀이를 가잔다.
윤미도 그걸 원하는 것 같고 해서 그들을 따라 시장통에 있는 삼겹살 집으로 갔다.
식구들이라고 해도 다 합쳐 다섯명이 전부인데 오늘은 나말고도 객이 한사람 더 끼어 있었다.
원장 친구라고 소개 했고 원장은 그를 김원장이라고 불렸다.
가까운 곳에서 웅변학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겨우 해봐야 삼십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김원장이란 사람은 그다지 유쾌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몰라도 호탕하니 웃을 줄도 모르고 괜한 폼만 잡고 앉아 있어서 분위기만 괜히 망치는 듯 했다.
내가 괜히 여기를 따라 왔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원장이 술을 내게 권했다.
“박 미희씨! 우리 장선생 그동안 잘 챙겨주고 해서 내가 말은 안했지만 늘 고마워 하고 있었어요. 이런 객지생활에 그나마 잘 견딜 수 있었던 거는 미희씨 덕분 맞죠?”
윤미에게로 다시 말을 돌려가며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장선생! 오늘은 내가 거하게 한턱 쓸테니까 분위기도 좀 내고...알았죠?”
윤미 역시 소주잔을 받아 놓고 있었다.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고기를 불 밖으로 내 놓으며 원장 사모는 연신 장선생 많이 먹어란다.
내가 봐도 오늘 이 자리는 윤미를 위한 자리처럼 보였다.
미술학원이라는 이름답게 명문 H대 미대 출신의 그녀는 당연한 대접을 받을만 했다.
그 덕분에 나 까지도 그 환대를 받는 기분이었다.
친구를 잘 둔 덕분인가.
속에선 이런 저런 생각으로 꽉차고 그것 때문에 생각없이 마신 술이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과 헤어지고 방향이 같은 윤미와 함게 학원 앞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속에 말을 내어 놓았다.
“나 솔직히 말해서 너 이런 모습 별로다. 그림 그릴만한 시간도 없이 유치원선생이 되어 버린 니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가 않아.”
나는 내 감정 때문에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희야! 나, 너무 믿지마. 그리고 나한테 니가 거는 기대가 사실은...부담스러워. 그림이야 계속 그릴테지만 그렇다고 그림만 그리지는 않을꺼야. 그러고 싶지 않아.”
그녀는 날 달래듯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내 차가운 손을 그녀는 내 애인이라도 되는 양 제 손에 꼭 넣어서 제 주머니 속으로 끌어 당겼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내 속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춥기만 했다.
그녀를 안으로 들여 보내고 숙소까지래야 겨우 1킬로미터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코트 깃을 올리고 몸을 잔뜩 움추려 뜨려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꼭 안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래 주었으면 싶었다.
제5장 변명
그날 밤, 나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미스 리 방문을 두들겼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개의치 않고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생긴 용기였던가.
그녀는 나의 출현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그녀의 표정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다짜고짜로 담배부터 한개 달라고 했다.
그녀는 아직도 뭐가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제 옷장에서 담배 한갑을 꺼집어 냈다.
그리고는 그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내게 내민다.
이게 얼마만인가?
거의 일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사실이 세월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나 되는 것처럼 늘 그렇게 12월은 서글펐던가.
일 년 전에는 나도 담배라는 걸 종종 피워 본적이 있었다.
구석진 카페에서 코헨의 노래를 들으면서, 혹은 밥 딜런의 그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정신없이 헤매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 정신 나간 남자친구 말고는...
한참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긴 담배 하나를 꽁초가 되도록 피웠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녀에게 이렇게 당당해지는지...
여전히 강아지 털 같은 머리카락에다가 복숭아 색깔 같은 얼굴을 하고는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몹시도 궁금해 하면서...
“요사이도 새벽기도 가니?”
그녀의 방을 둘려보면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아니야. 그때 잠깐 그랬지.”
그녀는 민망해 했다.
“잠깐 그랬다고?”내 말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뒤틀림에 꼬일대로 꼬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