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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BY 마음 2001-11-25

그 사건은 일단 김양하고 나만 아는 걸로 하고 끝을 맺었다.
나보다도 세살이나 위면서도 절대 날 쉽게 대하려 들지 않는 김양은 사무실 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누구에게나 정한 위치에서 깔끔하게 상대를 대할 줄 아는 야무진 아가씨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산부인과 간호사로 있던 지여사가 원무과에 들렸다가 나오는 날 데리고 자신의 근무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곤 미술학원의 장선생이 미스박 친구였다는 걸 얼마전에 알았다면서, 그렇게 실력있는 선생님이 왜 이런 촌 동네까지 들어왔냐고 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사실은 내가 미스박 여기 데리고 온 것은 의논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미스박, 교회 나간다고 들었는데 미스리도 같이 좀 데리고 가지 그래.”
나는 순간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위한다면 분명 그 방법이 제일 좋을 거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먼저 생각해서 말해왔지만 나는 한번도 그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뭣 한데 왠만하면 미스리하고 좀 잘 지내봐. 나이도 같고 생각해 보면 입장도 같잖아. 이런 객지까지 나와 있으면서 서로 좀 도와서 잘 지내면 좀 좋아.”
나는 지 여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녀와 얘기하는 동안 미스 리가 잠깐 들어왔다가 나갔다.
문이 열려 있었고 바로 옆 방 소아과에서 근무하는 미스 리가 무심결에 들린 모양이었다.
날 보는 눈이 여전했다.
나 역시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고 깊어져 가는 골은 도무지 회복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제 날 몰아세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 선생하고는 더없이 친하게 지낸다고 하던데...
왜 미스 리 한테는 그렇게 냉대를 하는지...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내말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모르는 뭔가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지난번에 미스리 결근했던 그날도 출근 안 했길래 내가 숙소에 가 봤더니 미스박은 벌써 나가고 없고 그래서 간 김에 여기저기 둘려 봤지.
다른 사람들이 미스리하고 미스박은 성격이 너무 많이 달라서 같이 살기는 힘들었을거라고 해서 나도 그럴거라고 생각은 해.
내가 봐도 미스리 철딱서니 없는거야 뭐 다 아는 사실이고,
한데 그날 숙소에 가보고 놀란게 있어.
그렇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옆방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건 좀 너무 한다 싶었어.
최소한 아침에 세수하려 나왔다가 인기척이 없으면 걱정이라도 될텐데... 안 그래?“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
무작정 듣기만 하고 방을 나오는데 왜 그리 화가 나는지...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시라고 냅다 소리라도 질려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말 한마디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여사한테 그런 말을 듣고 얼마 안 되었는데 윤군한테서 이상한 소리를 전해 들었다.
미스리가 새벽마다 어딜 간다고 했다.
뭘 배우려 다니는지, 운동을 하려 가는건지 아무튼 꼭 네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나간다고 했다.
이런 추운날에 운동을 하려 다니진 않을테고...
그런 차에 출근길에 미스리를 정면에서 볼 기회가 있어서 참지 못하고 곧바로 그것부터 물어 보았다.
“새벽에 운동하려 다니니?”
“아니! ”
“그래? 윤군 말로는 새벽마다 어딜 간다길래...”
“으응! 나...교회가.”
그녀의 대답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말하는 그녀를 두고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뭐? ”
“왜 난 교회 나가면 안되니?”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뒤 틀리는 걸 느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근데 너 원래 교회를 다녔었던 거야?”
“고등학교 때 잠깐, 그래도 그 땐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었어”
“그러니? 잘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 나간 것은 아닌 것 같고 지여사가 미스리한테 얘기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택했을까.
나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를 내가 다니는 교회로 불려들이지를 못하는 이유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작은 읍내를 가득 메울 때였다.
숙소를 막 빠져 나오려는데 미스 리가 품에 뭔가를 안고 숙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있던 이상하게 생긴 것이 악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뭐니?”
“만돌린이잖아.”
“만돌린?”
크기가 갓 태어난 애기 만 했다.
그것을 아기 안 듯이 안고 있는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다.
“어떻게 이거 할 줄 아니?”
“아니! 배워 볼려고...그래 넌 어디 가니?”
“응! 미술학원에...”
“그래? 잘 갔다와라.”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는 분명 불과 한 달 전에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변하는 것은 아무튼 내게 더 없이 다행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방에서는 자주 그 만돌린소리가 들렸다.
로망스를 연습 중이었는데 처음 듣던 소리는 아니었다.
만돌린의 그 떨림에서 나오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신기하게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윤미네 미술학원이 예식장을 빌려서 재롱잔치를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꽃을 사들고 그 장소로 찾아 갔다.
마침 아직 시작하지 않고 있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무대 뒤로 윤미를 찾아볼까 하다가 괜한 수선을 떠는 것 같아서 다른 부모들처럼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아 있었다.
지여사도 분명 올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지여사를 볼 자신이 없었다.
다행이 불이 꺼지고 무대에만 환해지더니 윤미가 검정색 정장차림을 하고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원장님을 소개 하겠다며 손을 뻗어 원장을 무대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보아온 지금까지의 윤미하고는 사뭇 달라보였다.
괴테를 말하고 밤바다를 찾아나서던 윤미하고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유치원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