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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BY byelover 2002-01-21

-기억18-
"여행"

창가로 들이미는 햇빛때문인지 영은의 머리카락은 더욱 붉어보였다.
민재는 그녀의 야윈 얼굴과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말없이 내려다보며
그녀가 가끔 올려다보면 알수 없는 짧은 웃음을 보였다.
터미널로 가는 첫차에 무작정 올라타긴 했지만 두사람의 마음은
사실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영은은 자신이 지금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그와 잠시라도 떨어져있기 싫은 지금 이순간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싶을뿐...
하지만 그의 얼굴에 잠깐씩 스치는 어떤 초조함이 그녀를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다.
터미널이 보이자 영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영은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차에서 내린 영은이 바라본 터미널건물은 마치 안개에 휩싸인듯
뿌옇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영은은 갑자기 불안함에 몸을 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도 묘한 기운이 감돈다.
그도 자신처럼 불안한걸까...?
영은은 문득 이런 자신의 감정을 위로하며 안아주지 못하고
덩달아 떨고 있는듯한 그가 원망스러워진다.
흔들리는 줄을 잡고 있는듯한 자신의 처지가 가여워졌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한듯
그가 영은의 손을 꽉 잡는다.
그리고 말했다.
"나...믿어줘서 고맙다.그리고...따라와준것도..."
그제서야 영은은 눈앞이 맑아진다.
그리고 그를 따라나선 자신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너 우동 좋아하지?"
영은은 그의 말에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그와 바닷가에서 뜨거운 우동국물을 마시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되돌아와 자신앞에 우뚝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슨일이 있어도 그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지.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그를 단념하기로 결심했던 날 빗속에 서 있던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그를 볼수 없었다.
바닷속으로 숨고 싶었다던 야속한 그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다.
지금 영은은 바닷속아니라 더한 그 어떤곳도
그와 함께라면 기꺼이 갈수 있을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암울하고 괴기스러워보이던 검은 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별안간 맡고 싶어졌다.
그가 숨기로 했던 그 바다에 가서 묻고 싶었다.
왜 그를 불러들였냐고,
그리고 왜 다시 자신에게 그를 돌려보냈느냐고...
그렇게 물을 참이었다.
왜그랬냐고...
그녀가 말했다.
"나...바다보러 가고 싶어요."

그때 그와 생전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두려워보이던 그 검은 바다가 지금은 어느사이 푸른빛으로
아름답게 그녀의 눈속에서 빛났다.
믿어버리기로 결심한 자신의 눈이 바라보는 바다의 색은
각양각색으로 출렁였다.
그러나 그 어디도 이젠 두려움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에게 이렇듯 가까이 다가와 있는 이 바다처럼
그또한 그랬으면하고 바래본다.
자신이 던지는 작은 돌멩이의 포물선이 얼마나 큰지를
그는 아마도 모르고 있는것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눈빛 한줄이 그녀에게 던지는 위로와 상처를
그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가 다가오는 기척에 영은은 숨을 훅하고 들이 마신다.
그도 자신처럼 이렇게 긴장이 되는걸까...?
아니면 자신이 정말 쑥맥이어서 그런걸까...?
그가 영은의 옆에 와 섰다.
그의 체취가 바람을 타고 그녀의 코끝에 와 닿았다.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제대로 자신을 숨겨주지 못한 바다를 원망이라도 하는듯
그의 눈동자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영은은 그런 그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두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보고 있다.
어디론가 멀리 숨어버리기로 작정한 두사람이 선택한 곳치곤
여기는 그들이 살던 곳과 너무도 가까운곳이었다.
영은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그냥 해본 말 아니었어요."
갑자기 내뱉은 그녀의 말에 그의 몸이 굳어졌다.
영은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도 내게 했던 말,진심이었길 바래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섰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갑자기 두려워졌다.
어젯밤 자신을 껴안고 같이 살고 싶다며 울음을 삼키던
남자의 모습을 그는 벌써 잊어버린걸까...?
그는 영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말할수 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진심이었어.하지만..."
영은은 떨리는 그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느낀다.
"너마저...나처럼 아무렇게나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내말은...그러니까...이런...제기랄."
갑자기 그는 짜증스러운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불끈 움켜잡더니 뒤돌아선다.
영은은 그의 마음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이사람은 뭐가 저리도 복잡한걸까...?
갑자기 그의 등을 보고 서있는 영은은 울컥 화가 치민다.
영은이 그의 앞으로 가 섰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늘 복잡해요?나...당신이랑 같이 살래.
그럼 된거 아녜요?당신 복잡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깔끔하게 당신 따라가겠다구요.나...우리 엄마,아빠한테
허락받는 복잡한 절차 포기하고 당신 따라 가겠다구요.
나...당신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깨끗한 애 아냐.나..."
"영은아!왜 이러니?그만..."
눈물이 흘러 다시 흔들리는 눈앞을 그의 손이 와 닿았다.
"뭘 그만해요?나...당신땜에 못 살겠어.여기가...여기가 너무
아파서 미치겠어.당신이야말로 왜이래요?
나한테...혹시 당신 지금... 장난치는거 아니지?그런거 아니죠?
네...?대답 좀 해.당신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나한테 ..."
그가 영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그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영은의 귀에다대고 그가 말했다.
"아니야.장난 아니라구!이 바보야.너...정말 바보같구나.
이런 대책도 없는 놈을 뭘 믿고...이 바보야..."
그의 목소리에도 영은의 눈물이 대롱대롱 맺혔다.

향기좋은 뜨거운 커피,푹신한 소파 그리고 그의 얼굴...
아무것도 더이상 바랄게 없을것 같다.
영은은 그가 피던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는 낯익은 광경을 말없이
팔을 턱에 괸채 보고 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화 좀 풀렸어?이제보니 너...고집불통이구나."
"이제 눈치챘어요?"
영은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
"너...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않니?"
영은은 그가 무슨 의미로 묻는 말인지를 잠깐 생각해본다.
그리고 곧 대답했다.
"물론 그랬죠.하지만 나...이제 어른이야.나혼자 독립할수 있는..."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엄마생각에 목이 메어왔다.
영은은 일부러 눈물을 감추려 빈 커피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가 그녀의 손에서 커피잔을 뺏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거봐.넌 나랑 다른 사람이라구.넌...나처럼 살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물론...내맘은 진심이지만...미안하다.너한테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그의 말에 다시 영은은 불끈해졌다.
"당신이 나한테 뭘 어떻게 했는데요?뭘 그러는게 아니었어요?"
"영은아!내말은 너한테 그런 대책도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게 아니었다는거야.제발...화내지 마라.내가 잘못했어.
내 감정에 취해서..."
"아니요.이젠 되돌릴수 없어요.나...이제 돌아가지 않을거예요."
"영은아!지금 넌..."
"날 설득할 생각 하지 마요.나...당신 기다리기만 할 자신 없어요."
그가 다 타서 제대로 입에 댈수도 없을것 같은 담배를
기어이 한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일어섰다.
"그럼...우리 이렇게 하자.일단 다시 가자.가서 넌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아.아니 말이라도 꺼내.그냥 이러는건 아니야."
"선생님처럼 굴지 말아요.가출을 허락할 부모도 있나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안함에 오히려 영은은 화가 난다.
"영은아!바보같이 굴지마.나도 너이상으로 널 원해.그러니까
내 말 들어.내가 허락 받을께.네 부모님께 같이 가자."
뜻밖의 제안에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뭐라구요?"
"내가 아니 우리 같이 가서 허락받자구.그리고 여기 떠나자.어디든."
영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편이 나을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것 같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그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이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그냥 같이 살게 될 사람이라고,이사람과 함께 살것이라고
무작정 그렇게만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영은이 물었다.
"당신은요?그게 순서라면...난 당신 부모님께 허락받아야 하는거
아닌가요?나도..."
그가 말을 가로챘다.
"아니.난 부모님 안계셔.아니 허락 받을 부모따윈 없어.하지만...
허락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한사람 있구나.그래.
그게 먼저일것 같다.그래.그러자.우리 같이 그사람한테 먼저 가자.
그래. 가서 말하자."
부모가 없다고...?
부모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부모의 존재를 부정한다는걸까...?
그리고 그사람이라니...?
뜻밖의 말에 영은은 몹시 당황스러워진다.
"가자."
그는 결심한 얼굴로 이젠 그녀를 오히려 다그친다.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어있는것 같았다.
그는 영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힘들더라도...그래도 네가 잘 참아내줄거라 믿어."
"무슨 뜻이에요?"
"힘내란 뜻이야.잘될거야.우리 이렇게 서로 진심이니까..."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영은이 물었다.
"부모님이 아니라면...그럼 허락 받을 사람이 있다는거...
누구에요?...먼저 말을 해줘야 마음의 준비라도 하죠."
그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그는 힘들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만난적 있을거야.언젠가 카페에서..."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영은은 그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수 있었다.
영은은 갑자기 마음이 상했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하며 자신을 애써 달래본다.
"소희라고...지금 만나러 갈거야.너랑...괜찮겠니?"
그가 자신의 입으로 여자의 이름을 말하자 마음이 아파왔다.
그러나 영은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지금부터 그를 얻기위한 긴 여행을 하게 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말 그대로의 긴 여행을...
몹시 두려워졌지만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것 같다.
영은이 말했다.
"함께 갈거죠?우리 함께 가는거죠?"
"물론이지.하지만...힘들지도 몰라."
힘들지도 몰라...
그래요.하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만 말았으면 좋겠어.
아니 조금만 아팠으면...
그러나 자신의 바램이 헛된것임을 영은은 안다.
벌써부터 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미안해요...
영은은 연습해야 할것 같다.
'미안해요,허락해주세요'라고...
하지만 왜 그녀에게 허락을 받고 싶은것인지
그래야만 하는지 그를 이해할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를 얻기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