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되돌리고 싶다. 남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어긋난 삶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가 가장 행복했을까. 그래도 집에서 학교다니던 고등학교 때 까진 힘들었지만 행복했었다.
아버지한테 일본어와 한문을 배우던 생각이 난다. 엄마는 다른 건 안보고 아버지가 대학 나왔다고 해서 없는 집에 시집왔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버지 최종 학교 대학 나온 사람 손들라고 하면 우체국장 딸하고 둘이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번쩍 들던 기억이 난다.
대학엘 가니 지금껏 없이 산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집엔 산채로 생이별 당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남의 일이라고 모른척 지나갔으면 남편을 안 만났을까.
고등학교 다닐 때 여자친구가 군인한테 끌려갔다는 것이다. 여러개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끔찍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보여 주었다. 그럴때의 민수씨가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넌 너무 약하니까 내가 볼봐 주어야 할것같다.
그가 생활하던 서클룸에서 몸을 허락했을 때 그는 말했다. 그가 내 몸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가 나 때문에 몸을 떨 정도의 희열을 느낀다고 감격했던 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고 많은 사람이 그를 필요로 했다. 그의 곁에서 그만 바라보며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민수씨 말대로 내가 변했을까.
내가, 니 그렇게 시집 보낼라고 없는돈에 공부시켰냐.
그러면서도 엄마는 이리저리 빚을 얻어 이백 만원을 마련해 주셨다.
이거면 이불하고 싼 장롱은 살수 있을꺼다. 더 이상은 우리 형편에 무리라는걸 니도 잘 알끼고.
엄마한테 그 돈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보아란듯이 당당하게 잘 살 자신이 있었다.
협회에서 수고했다고 가끔씩 주는 활동비, 생활비는커녕 자기 활동에도 못 미치는 돈만 보고 살수는 없었다.
넌 변했어. 예전에 너가 얼마나 빛이 났는지 알아?
요즘들어 남편은 자주 말한다.
연초에 인사를 왔던 어떤 여자가 생각난다.
그래 얼마나 자랑스러우세요.
그녀가 흰 봉투를 내밀며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말 나를 부러워 하거나 남편을 존경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랑스럽다구?
한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제가 변했거든요.
아까부터 난 그녀가 입고와서 먼지가 묻을세라 뒤집어 바닥에 벗어 놓은 코트에 눈이 가 있었다. 한번 입어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칠세라 두 손은 맞잡은 채였다. 코트 안에는 앙골라로 된 반 팔 분홍빛 원피스가 몸에 착 달라 붙어 있었다.
기름을 아낄려고 절약 난방에 맞춰 놓은 보일러 온도가 추운지 그녀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일어나서 온도를 올리진 않았다.
같이 올려고 했는데 공부때문에요.
그녀가 나가서 얼마나 자기 딸한테 닦달할지는 안봐도 알 것 같다.
내가 왜 그런 사람들한테 굽실거려야 돼. 다 너 때문이야. 이게 무슨 망신이야 대체.
그녀는 아마도 자기 딸을 찾아준 남편이 고마워서라기 보다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딸이 술집에 있었다는 걸 남편이 소문이라도 낼까 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 관심은 다시 봉투에 가있다. 얼마나 들었을까. 저 돈이면 전세로 돌리면서 회사에서 융자 받은돈을 갚을 수 있을까?
이런거 받으려고 일하는거 아닙니다. 다시 넣어 가세요.
내 상상을 깬건 남편의 말소리였다. 난 깜짝 놀라 남편을 바라보았다. 제발,민수씨...
다행히 그녀는 봉투를 거두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고 내려가는 그녀 뒤를 따라 가라고 봉투를 집어주며 남편은 나를 내몰았다.
내가 천천히 오층에서 내려갔을 때 이미 그녀는 날씬한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간 뒤였다.
당신 내얼굴에 먹칠 할 셈이야? 왜 그래, 돈이 그렇게 좋아?
내가 봉투를 열자 그는 기겁을 하며 나에게서 봉투를 낚아챘다. 언뜻보니 파란색 수표가 몇 장 되는 것 같던데 마치 먹을 걸 빼앗긴 아이처럼 우두망찰했다.
그럼 그 돈 어떡할려구요?
목이 뻐근해 와서 말하는데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회비 해야지. 가뜩이나 운영이 힘든데...
그는 내가 다시 봉투를 빼앗기라도 할까 봐 점퍼 안 주머니에 단단히 찔러 넣고 지퍼를 올렸다.
당신은 협회 운영 힘든건 알고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는 거에요?
그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집이 있잖아.
남편은 안타까운 눈을 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집이 있다구? 두달 전부터 전세금 올려달라구, 아니면 빨리 집 비워 달라는 이 집? 경희한테 돈을 빌릴까, 아니 차라리 집을 줄여 한 칸 짜리로 이사를 갈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 집?
그의 얼굴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