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근처엔 백화점이 있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호수와 백화점 중간쯤에 마대를 늘여 놓고 백화점 손님과 호수에 놀러나온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이벤트를 벌였다. 호수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사람이 많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중학생들이 춤을 추든 그건 그리 내 눈길을 끌만한 일이 아니다.
난 남과 다르게 어디서든 혼자 몸을 웅크리는 법을 알고 있다.
언젠가 부터 남편은 내 옆자리로 와서 오래도록 호수를 바라보곤 했다. 남편은 일하는 틈틈히 쉬고 있었다고 했다. 물을 좋아하세요? 하고 내게 말을 붙였다.
물을 좋아해서 호수를 바라본 건 아니었다. 강이나 바다처럼 어딘가로 끊임없이 뭔가에 밀려 가는걸 바라보는 건 생각만으로도 어지럽다. 호수는 그냥 고여 있어서 좋았다.
그녀가 디스켓을 꺼내고 가방에다 짐을 꾸리는 동안 난 창가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방을 메고 날 본다.
어제 두 주쯤 집을 비울꺼란 말이 생각났다. 이제 겨우 내차례가 되어 마악 그네를 타려고 할 때 엄마가 내 손을 잡아 끌었을때 처럼 아쉽다.
"가끔 놀러와도 되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운해 하는 내게 자신이 들고 있던 용지 몇 장을 내밀었다.
"이거 한번 해봐요. 다 믿진 말구 재미로." 용지를 받아 들고 그녀의 집을 나서는데 우리 집 쪽에서 전화밸이 울린다. 급히 인사를 하고 문을 닫을 때 보니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집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다가 몸을 획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남편은 옆집에 갔다 왔다는 내 말에 두시간씩이나? 하며 놀랐다. 하긴 내가 만나는 친구란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민정이 하나 뿐이란걸 아는 남편이, 알지도 못하는 옆집 여자네서 두시간씩이나 놀다 왔다는 것에 대해 놀랄만도 했다.
전화를 끊고 그녀가 준 용지를 들여다 보았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으세요?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것에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롭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수 있다니.
'상대에게 풍경화를 그려 보라고 하세요. 무엇을 그리는지 내용에 따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였다. 연필을 가져다가 뒷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땐 종이 가득 호수와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조금 전 옆집에서 본 그림이라 해석이 신빙성은 덜 할 것 같다.
용지를 뒤적거려 해설을 찾았다. 이런,
호수를 그린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속마음을 드러내기 드물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원만치 않음, 이라고 적혀있다.
나무를 굵게 그리는 사람은 약간의 열등감이 있고 가늘게 그리는 사람은 섬세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예민한 타입이라고 한다.
재미있다. 내가 그린 나무는 몇 사람이 올라가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다음 문제는 그림이었다. 어떤 남자의 하반신만 보인다. 다리를 꼬고 서 있다. 이 남자는 무얼 하고 있을까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에 표시했다.
당신은 평범한 사람. 상식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모험을 싫어 한다고 적혀 있다. 테스트가 맞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오면 물어봐야 겠다.
저녁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넣은 채로 남편에게 용지를 매밀었다. 남편은 내가 내민 종이를 한번 쓰윽 훑어 내리더니 나힌테 뭘 알고 싶은데, 하며 흥미 없어 했다. 난 세 번째 장 중간쯤에 있는 문제를 손으로 짚어 남편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 문제는 상대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내 테스트 결과는 의외로 명예라고 나왔다.
"이런 게 재미있어? 그 여자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네."남편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망연히 앉아있는 내게 미안했던지 남편은 손을 내밀어 줘봐, 했다.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서 신문지를 쌓아 놓은 박스에 용지를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