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이 얼마나 비싼데요. 그건 다 수입이에요. 그리고 봉투는 묶는 것 보다 입구를 테이프로 붙이세요. 훨씬 더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녀가, 내가 버린 쓰레기 봉투안에 있는 맥주 켄을 보고 말했다.
"죄송해요."
이런, 어제 오늘 벌써 두 번이나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가 버린 쓰레기 봉투는 내것보다 부피가 훨씬 컸다. 그녀 뒤를 따라 삼층까지 말없이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손잡이를 비틀다가 뒤돌아보며 차 한 잔 하실래요? 하고 말했다.
그녀의 방은 이제 막 이사를 왔거나 이사를 가기위해 마지막 짐을 꾸리는 집처럼 어수선했다. 그 흔한 커튼 하나 달지 않은 방의 벽면 한 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호수 그림이었다. 나무 벤치가 드문드문 있고 호수 둘레에는 빽빽하게 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림엔 나뭇잎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한 여름엔 근처만 가도 한기가 났을 것 같다. 나무와 벤치 사이에는 울긋불긋한 낙엽이 방석처럼 깔려있다. 저 그림에 있는 호수가 근처 어딘가에 있다면 난 매일 그 호수를 보러 갈 것이다. 이 도시엔 백화점 근처에도 그 흔한 분수대 하나 없어 나를 갈증나게 한다.
나도 모르게 팔에 오스스 소름이 일었다.
남편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거의 매일 오후를 집 근처 호수에 가서 한참을 앉았다가 오곤 했다. 저 그림엔 나처럼 호수를 바라보는 여자도, 어느 그림에나 있을법한 다정한 연인도 없다.
"그림이 너무 외롭네요."
한참 후 팔을 쓸어내리며 내가 말했다. 아까부터 무슨소린가 했더니 그녀의 책상위 프린터기에서 용지가 계속 인쇄되어 나온다. 집안에서 이런 풍경을 보는 건 낯설다. 마치 사무실 같다.
컴퓨터 옆 주석으로 프레임 처리된 액자 속에 예닐곱 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활짝 웃고 있다. 놀이 공원인지 뒤로는 풍차가 보이고 흰말 모양의 회전목마에 앉은 사내아이의 얼굴이 너무 해맑아 나도 모르게 사진속의 아이 얼굴을 만졌다. 아이가 낯설지 않다.
자세히 보니 엄마를 닮았다. 그녀가 냉장고를 에서 생수를 꺼냈다. 커피 물을 올리고 분쇄기에 원두를 간다.
컴퓨터 화면에 그림이 많았다. 자세히 보려하자 그녀가 웃으며 내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고개를 움직여 장난치듯 화면을 쳐다보았다. 가벼운 장난이 우리를 친한 사이 같이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호수가 있는 그림만으로 날 언제든지 이곳으로 이끌 수 가 있다.
"잡지사에 보낼 원고에요." 그녀가 용지를 챙기며 말했다.
기자나 선생님 같이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난 이상한 외경심이 있다.
"기자에요?" 내 목소리에 부러움이 담겼다.
"아니요. 그냥 이곳 저곳 청탁 받은것만 써요. 객원기자 같은거요." 그녀가 말한게 뭔지 난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도 없는것 같은데 집에만 계세요?" 그녀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예, 하는 내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지금껏 직장생활을 해 본적이 없는 내게 가장 곤란한 질문이 이런 것이다.
"혼자 사세요?" 내 말에 대꾸 없이 그녀가 창밖을 본다.
"이혼했어요" 그녀가 내뱉듯이 말한다.
괜한 말을 했구나.
그녀는 내 맘을 읽은 듯 괜찮아요, 하며 잔에 묻은 커피자국을 문지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였다.
아이의 엄마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말하며 웃을까.
그녀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을까. 내 정수리쯤. 갑자기 정수리 부근이 장마가 끝난 여름 오후 두시 처럼 따가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