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교한 달빛이 내려앉은 뱃머리 귀퉁이에
힘없이 기진한 상처로 찢기운 두 영혼이 훌쩍이고 있다.
오간데 모르고 바람이 얼마나 불었는지....
폭풍이 얼마나 살갗을 너덜거리게 했는지.....
그런것들은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나 알까.
훌쩍이는 눈물속에 오년간의 시간이 소용돌이 치며 진하와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내가 눈물밖에 그에게 더 내어놓을것이 있었던가.
빛나던 우리의 희망은 곤두박질 친지 오래이고,
내 눈에, 마음에 가득 들어찬 그늘은 진하역시 친숙한 친구 삼았을 터 였던 우울한 공백들...
사위는 둘의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듯 모든것이 정지한 듯 숨죽인채로 우리를 지켜본다.
나는 진하가 입을 떼는것이 지난 오년간 내가 겪었던 어두움의 나락끝 보다도 더 두려웠다.
진하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을 잡는것도 익숙치 않고 낯선 꼬마들 이었었는데.....
손가락에 끼인 반지의 감촉에 흠칫 놀라는 진하.
"손가락이 허전해서...."
목메인 내가 뗀 첫마디였다. 정말 허전해서였다.
내가 진하를 애닯게 그리워 해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나는 진하를 그리워 하면 안되는 육신 아니었던가.
"현지야, 춥니? 떨지마..."
내가 떨고 있었던가?
아닌데.... 그냥 두려울 뿐인데.....
"어디서부터 네게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겠다. 현지 너의 이야기는 또 어디서부터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고.....휴......그래 하지말자. 우리둘 다 아무말도 하지말자."
진하의 한숨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많이 힘들었지?"
진하가 끝내 포기했던 진학에 대한 부분부터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달빛에 비추인 반쪽의 음영깊은 진하는 쓴 웃음을 짓는다.
"힘들었냐고? 아니..."
"이제와서 말한마디 없이 사라진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될런지...."
"넌 미안한거 없다. 당황은 했지만 내가 바란것은 단 하나야."
반쪽의 얼굴이라도 꼼꼼히 내 눈이 진하의 얼굴을 훔쳤다.
어느때는 기억조차도 희미해 지는것이 서러운 진하의 얼굴이었다.
희미해 져야만 하는 내 기억의 끝을 붙잡고 안간힘 쓰던 얼굴.
이제 확실히 기억이 난다.
모든것이 생생해.
너의 웃는 모습이 어땠는지, 장난하는 얼굴이 어땠는지 이제는 확실해.
말을 잇던 진하가 내게 고개를 돌리는 찰라에 얼른 다시 얼굴을 숙였다.
"내가 현지 너에게 바란것은 뭔지 아니?"
"...."
그가 바란것은 무엇일까!
솔직하지 않았던 내게 따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어긋난 길을 되돌려 줄 원점이 다시 필요했던건 아니었을까!
"현지야..... 네가 살아있기만 바랬다. 이 세상에 살아 있어주기만 하면 되었어"
잦아든 눈물이 다시 솟구친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친구 진하야....
난 죽는것 보다도 더 비굴하게 지냈어 진하야....
마음속에 젖어드는 말들을 입밖으로 꺼낸다면 용서해 줄까 싶어 말을 아껴야 했다.
진하에게 필요한 것은 예전의 나 였지, 결코 지금의 나 는 아니었다.
지금의 나를 용서하면 안되는 것이 진하와 나의 몫이었다.
난 철저하게 바닥을 기고 있는 중이니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머리를 기울여 내 머리에 기대었다.
"울지마 현지야. 네게 미안하다는 말 듣자고 오늘 온거 아니야"
"그래도 미안해 ...."
"내 탓이었어. 네가 없어진 그 해에 입학을 하지 못했으면 다음해도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어. 의지가 너무 약했던것은 내 책임이야. 현지야 그동안의 조금의 이야기는 들었다. 은경이한테"
"들은대로 형편없이 살았다 나...."
더이상의 말을 못하도록 내 입술에 진하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쉿......"
진하의 손가락은,
입술을 따라 그리고.....
얼굴선을 따라 부드러운 원을 그리듯 머리카락 한올 한올의 감촉까지 그리며....천천히 움직였다.
내 모든 할말들을 진하는 손가락의 감촉으로 내 몸에서 전해지는 떨림의 느낌으로 전해듣고 있는듯이, 천천히..... 나를 그린다.
내가 할 말들을 진하의 손가락은 먼저 전해받고,
투명한 눈빛에 담아 안심시킨다.
이 손가락의 느낌,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걸까.
정신이 아득해져 휘청거리는 것을 겨우 제자리에 돌려놓느라 자세를 고쳐앉았다.
나는 진하 앞에서 흐트러지면 안되었다.
그애 앞에서 흐트러지면 안되는 자격없는 육신 아닌가.
"내가 헤메는 오년간 살아 있어만 주기를 바랬고, 그리고도 너를 만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아니?"
너는 손가락으로 나를 읽어내는데, 왜 나는 네게 손을 뻗치지 못하는거지?
나도 너의 얼굴을 그리고 싶은데....
차가운 맥주맛에서 느꼈던 부드럽게 퍼지는 너의 느낌을 그려보면 안될까?
진하보다도 더 절실하게 손을 뻗어 기대고... 원을 그리는 것은 숨겨진 내 안에서만 가능한 몸짓이었다.
널 만져보고 싶다, 진하야.
"언젠가 이야기 한것 기억나? 우리 길을 잘못들어 공동묘지에서 뛰었었잖아."
아! 그랬었어.
그랬던 적 생각나.
우리는 토요일 교외로 나간다고 하였다가 그만 공동묘지로 들어서 버렸지.
나는 무섭다고 혼비백산을 하였고, 너는 장난을 했어. 나를 골려준다고.
"그때 묘지 입구의 소나무에 우리 이름을 새겨 놓은 것 생각나?"
그랬었어.
가방을 뒤져서 칼로 너와 나의 이름을 새겼었지. 중간에는 커다란 하트를 그려놓고.
우리가 이다음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이 나무를 파서 우리의 집에 옮겨놓자고..그랬었어.
기억나. 기억나 진하야. 나 이제 다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