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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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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아나스타샤 2001-09-10

눈을 떠보니 상미의 그늘진 얼굴이
걱정을 담은채로 내려다 보고 있다.
"괜찮어?"
"으응..."
억지로 웃음을 띄워 보려고 애썼지만 쏟아져 내리는 숙취의 두통과 온몸의 뻣뻣함에 자유스럽지가 않다.
"상미야 나 집에 내려갈께"
"이대로 태원이 그 인간하고 끝내려고?"
"응 그럴거야. 내가 끝내지 않으면 더 비참해져 나 다시 시작해 볼거야. 사랑하지 않았었는데, 붙잡고 매달리는것은 나를 돌보아준 태원씨에게 죄를 더 짓는거야"
상미는 다시 시작하겠다는 내 말에 안도가 느껴지는지 활짝 웃는다.
친구라는 말 뿐, 제대로 도움한번 주지 못한채로 상미 옆에서 지낸 이년간이 울컥 입 밖으로 쏟아질것 같아 그냥 눈을 감았다.

훈기없는 방은 어젯밤 초조한 발길로 나서던 그대로였다.
태원이 사준 옷,
말려서 매달아 놓은 마른 꽃,
함께 했던 이부자리.
앉은뱅이 탁상위에 놓여진 거울속에 우리의 모든것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한번 떠나야 겠다고 마음먹으니 그 다음은 수월했다.
속옷 몇개와, 평상복 몇개, 화장품 서너개로 가방을 채워 문 입구에 놓고 태원과 그의 부모님께 발견될 쪽지를 각각 준비했다.
내 심경속의 할말들이야 태산 같지만, 모든것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비참했다.
태원의 머리속에 숙제로 남겨질 여백 많은 쪽지......
그리고 태원의 부모님께는 아직도 포기가 쉽지 않은 절절한 애정을 담아 감사로 표현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내게는 그래주셨다.
기본 도리는 아니었지만, 회사에도 전화 한통으로 퇴직을 결정하였고 소리 안나게 방문을 닫고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 놓고....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내 손에 쥐어진 시골행 차료를 들여다 보자니 깨알같이 인쇄된 글자들에 눈앞이 흐려졌다.
...이 차표 한장을 손에 쥐자고 나는 이년간을 소모했구나...
버스에 올라 커텐으로 해를 가렸다.
차창에 비추이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에도 용기가 없었다.
버스가 달릴수록 나는 추한 스물둘의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도록 최면을 걸며....

이년간 한번도 고향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애써 기회를 만들지 않기도 했지만, 집은 늘 부담스러웠고 진하와 흔적이 있는 거리를 깨끗하지 않은 몸으로 밟고 싶지 않았기에.
연락없이 내려온 딸의 가방을 받아드는, 허름하지만 손길 많이간 집을 뒤로하고 선 엄마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피로가 몰려왓다.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내려감기고 다리에 힘이 풀렷다.
"엄마 나 잘께..."
허름한 집의 허름한 잠자리에서 허름한 영혼이 몸을 눕혔다.
나... 엄마에게 돌아온거야....
나... 마음놓고 진하를 그리워 할 수도 있게 되었어...
나... 괜찮아... 괜찮아....

진하로 인한 파경인것은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이 어렸고, 동의없는 동거를 시작했지만 엄마에겐 사위였으니까.
사랑하는 딸의 원인과 결과를 조금은 속은채로 엄마는 걸러서 들어야 했다. 끝 새카맣도록 타들어가는 담배불에 다시 새것을 꺼내어 불을 붙이는 엄마의 검게 죽은 입술색을 보며,
엄마의 가슴속도 저런 검은색이리라....
그냥 담담한 채로 엄마를 이해시켰다.

집에 내려온지 며칠이 흘렀고, 나는 학생때 하였던 축사일을 텅빈 눈으로 돕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
구비구비 버스도 겨우 들어오는 시골집 마당에 친구 세명이 들어섰다.
졸업도 끝내지 못한 나를 친구들이 얼마나 애타했는지 그들의 마당에 들어서는 발자욱 소리에 그리움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