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으러 이장네 집에 가니 언제 왔는지 벌써 주천댁이 담배를 뽑고 있다. 손바닥만한 동네라서 안부딪치고 살수는 없지만 만날때마다 서먹하고 부담스러워 피하게 된다.
애들엄마와 합치지 않았으면 늘그막에 주천댁하고 의지하며 살았을거라는걸 동네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째 색은 잘났나요? 어이구, 아직도 다 안눅었네. 이걸 다 언제 빼나..하며 괜한 너스레를 떨어 보지만 주천댁은 힐끗 쳐다만 볼뿐 대답을 안한다.
이렇게 머쓱한 기분이야 한두번도 아닌데 당할때마다 민망하다.
"이제 오세요? 빨리 들어가셔서 아침드세요. 아버지도 안드시고 기다리고 계세요."간호대를 졸업하고 읍내 보건소에 다니는 이장 딸 민숙이가 외출복을 갈아입고 나오며 인사를 한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갑자기 알려준 민숙이가 너무 반갑다. 아침 일찍 어디 가냐? 하며 마루로 올라선다.
"오늘 일요일 이잖아요. 오늘부터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시작해요. 참,애들 일어났지요? 제가 유치부 맡았거든요. 애들 데리고 간다고 아줌마 한테 말씀 드렸는데..."
"일어는 났는데 세수도 안하고 회관 마당에서 놀고 있을거다. 수고스럽지만 좀 데리고 가거라."하며 마당에 있는 주천댁 얼굴을 힐끗 본다.
"보나마나 여편네가 늦게까지 퍼질러 있느라 제대로 애들을 씻기기나 했을지 모르겠다. 벌떼같은 지집년들 챙피헌줄도 모르고 데불고 댕기도 고마운줄을 아나 원..."기다렸다는듯 주천댁이 흉을 본다.
"아주머니도 참, 챙피하긴 누가 챙피하다고 그래요. 난 그냥 싫다고 안그러구 꼬박꼬박 다니는 것만해도 이쁜데요. 아저씨 빨리 들어가세요." 하며 민숙이사 둘을 번갈아 보며 웃는다. 아마도 둘의 사이가 어떻다는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쁜것도 쌨다...중얼거리는 주천댁을 못 본척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이장이 아침상을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다. 밥상에는 바쁜와중에도 언제 장을 봐왔는지 고등어 조림도 있고 얼큰한 두부찌게도 있다. 보나마나 두부는 이장댁이 손수 만들었으리라. 아침에 본 자신의 집 그 초라하기 그지없던 밥먹는꼴이 저절로 생각나서 마음이 언짢다.
"먼저 들지 왜, 시장할 텐데...애들은 다 먹었나?"하며 복수 아버지가 숟가락을 든다.
"애들은 먼저 먹고 민숙이 방에서 테레비 보네요. 저 아주머니 저러시는거 하루이틀도 아니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형님, 다 형님 생각해서 그러는거니까. 그래도 형님하고 애들을 많이 생각해요."밖에서 하는말을 들었나 보다.
물론 주천댁 마음이야 복수아버지가 더 잘안다. 사실 요즘도 가끔씩 자신의 경솔했던 선택에 대해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었다. 복수엄마가 살아있을때도 형님,아우 하며 두여자의 사이가 좋았었다. 혼자 사는 처지가 비슷해서 의지했을 터였다.
말이 없고 얌전하기만한 복수엄마와 인정많고 사내같은 성격의 주천댁이 잘 어울렸던것은 본디 서로의 심성이 착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복수엄마 가고나서는 복수가 불쌍하다며 조금의 삼감도 없이 들락거리며 반찬도 해다놓고 큰빨래나 이불빨래도 해놓곤 했다.
복수엄마 그렇게 되고부터 술에 절어 살던 복수아버지가 집안살림이나 심지어는 복수도 안중에 없이 살때 주천댁이 그런다고 해서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복수가 국민학교 입학할때가 되었다. 이장 모친은 복수아버지를 불러다가 그렇게 살거면 복수를 다른집에 양녀로 보내라는 말까지 하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꺼냐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은근히 재혼얘길 비쳤다. 주천댁이 어떠냐고도 했다. 그만하면 한몸 단촐하고 서로 잘아는 사정에 복수도 친딸처럼 아끼니 꼭맞는 상대라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보는 주천댁의 시선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