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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BY dlsdus60 2001-06-16

"지난번 만났을 때 혜선씨가 말했던 것 중에 이해를 못한 게 있는데요. 물어도 되나요?"
"물어 보세요. 뭔데요?"
"저기, 다름이 아니라 모태신앙이라는 것이 뭔가요? 내가 종교에 워낙 무지해서요."
"호호!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럼요. 정말 몰라요!"
"앞으로 인호씨, 저에게 종교에 대해 많이 배워야겠어요. 호호!"
"그럼 좋구요. 뭔데요. 어서 말해봐요!"
"어미 母, 삼 胎라는 한문은 아시죠?"
"아! 알았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신앙이 모태신앙이라고 하는군요."
"맞아요. 호호!"
"난 무슨 철학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인 줄 알았어요."

밖은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레스토랑 유리창 쪽으로 가지를 뻗은 가로수가 어둠의
가운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길가에 서 있는 가로등은 그 가운을 벗기려는 듯 하나 둘 빛을 내기 시작하였다.
레스토랑의 실내는 따뜻한 온기가 더해가고 자리를 매운 사람들의 도란거리는 음성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인호는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좀 피워도 되지요?"
"그러세요."

혜선은 인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입을 열었다.

"담배 맛은 어때요?"
"글쎄요, 별 맛은 없어요. 습관적으로 그냥 피워 없애는 거지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맛없는 연기를 왜 마시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혜선씨 말이 맞아요. 백해무익한 담배를 나도 왜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군데에서 처음
담배를 알았죠. 군대 생활을 하다보니 담배를 피워야 될 일밖에 없더라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군대라는 곳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오로지 건강한 육신과 획일화
된 행동만 요구할 뿐이죠. 그래서 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몸은 건강해 졌지만 마음은 날이
갈 수록 황폐해지더군요."
"그래서 군대가 인호씨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다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내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군대를 간 건지 군대가 나에게 담배를 피우게
만든 건지..."

혜선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인호의 언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혜선의 마음속에 인호라는 한 남자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혜선은 자신도 모르게 인호를 자신의 미래와 결부시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선은 인호를 만나기 전부터 의진에게 나이와 직업, 성격 그리고 외모까지
물어보았다.
혜선의 기대를 의식한 듯 의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마, 인호 그 남자 너하고 잘 어울릴 거야! 생각도 너 만큼 깊은 사람이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남자야! 너 인호씨 놓치면 후회할지도 몰라!"

혜선은 의진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래서 자신 앞에 있는 인호의 언행이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는지 모른다.
인호를 보면서 헤선은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남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호의 마음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했다.
시간이 흘러 밤 11시가 가까워지자 인호는 초조한 듯이 시계를 보며 혜선을 걱정했다.

"너무 늦었네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군요."
"아니에요.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요."

인호는 혜선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서로가 처음 만나면 가족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데 인호는 오늘도 혜선에게
가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의진을 통해 서로의 가족 상황은 조금 알고 있었지만 혜선은 인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인호는 자신이 궁금하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함부로 묻거나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인호는 언젠가는 서로가 가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의진의 말대로 매사가 신중하고 기다릴 줄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혜선 또한 인호 앞에서는 모든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인호가 이해할까 두려웠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손을 흔드는 인호는 자신만큼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호는 혜선이 버스를 타기 전까지 그 외로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친구 만났니, 왜 이렇게 늦었어?"
"네!"
"친구 누구, 저녁은 먹었니?"
"있어! 엄마는 뭘 그렇게 알고 싶어?"

엄마는 현관문을 들어서는 혜선을 보자마자 하루 종일 말 한번 못해 본 사람처럼 물었다.

"처녀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돼서 그렇지. 친구를 만나도 집에는 좀 일찍 들어와!"
"엄마! 나도 이제 어른이야, 언제까지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
"맞다! 너도 어른이야. 하지만 그 나이에 남자 친구하나 없이 맨날 여자들끼리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좋아?"
"엄마는 별 걱정 다 하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남자 친구도 생기는 거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데요?"
"알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혜선은 스물 다섯이 되면서 자신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교회나 직장을 나가고 친구들을 만나도 그런 기대는 어김없이 무너지고 벌써 일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
엄마도 혜선의 마음처럼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된 딸이 남자 친구가 없다는 불안감 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20년 가까이 딸과 단둘이 외롭게 사는 것도 지겨웠을 것이다.

혜선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늘 혼자 있었다.
엄마는 혼자 있을 때마다 외로움을 닦아 내듯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를 하였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화초에 물을 주거나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