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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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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BY dlsdus60 2001-06-16

인호는 텅 비어버린 가슴을 채우려는 듯 주전자에 담겨 있는 물을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균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여자를 데려다 놓고 사라진 걸까?
군대에 간 사내들이 휴가를 나오면 누구나 한번쯤은 있는 일이라고 균호는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내가, 이 차인호가 동정을 잃어 버렸다. 그것도 매춘을 하는 여성에게, 자신도 모른 채...'

인호는 갑자기 자신의 상징이 궁금했다.
그래서 자신의 상징을 형광등 불빛에 비춰보고 만져 보았지만 여느 때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결한 물질에 오염이 된 듯한 느낌에 샤워기를 틀어 놓고 씻고 또 씻었다.
불안하기만 하던 생각이 조금은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인호는 균호에게 전화를 하였다.
한참 동안 울리는 전화벨이 끊길 즈음에 잠에서 덜 깬 균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균호 너,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이리와 ?f!"
"왜 그래? 임마! 재미는 좋았지? 히히!"
"잔말 말고 빨리 튀어 왓!"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나 균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인호는 균호를 한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애써 인내하며 물었다.

"야, 자식아. 어떻게 된 거야!"
"뭘 임마! 사내자식이 군대가면 여자 맛보기가 힘들 것 같아 이 형님이 선물한 건데.
고맙지?"
"뭐라고! 누가 선물 하랬어!"
"시끄러 임마! 배고프지? 아침이나 먹으러 나가자! 저기 군청 뒤에 가면 해장국 죽이는데
있다. 빨리 옷 입어!"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어 담을 수도 없는 일 이였다.
인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동정을 받칠 거라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십 년이 넘도록 소중히 간직하던 동정 이였는데 균호 때문에 인호의 동정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인호는 혜선과 길을 걸으며 허기진 배를 채울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낯선 영등포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가지런히 빗어 내린 혜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혜선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뭐든 잘 먹어요."
"그래요! 그럼, 소화 기능은 별 이상이 없다는 말이고 배설 기능은 어때요? 하하!"
"뭐라구요? 호호! 인호씨 보기보다 웃기네요. 배설 기능도 무리가 없다고 해 두죠, 뭐!"

둘은 처음 만날 때보다 쑥스러움도 덜했고 서로에게 조금씩 동요되고 있었다.
인호는 영등포 거리도 명동 못지 않게 번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지만 도시도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인호는 서울에 온 후 역촌동과 종로 그리고 충무로 거리밖에 다녀 보질 못했다.
역촌동은 형님 집이 있어 인호가 숙식을 위해 눌러 앉았고 종로는 디자인 기초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 했다.
그리고 충무로는 학원장이 추천을 해준 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벌과 나비처럼
쏘다녀야 했다.
인호는 서울에 상경한지가 벌써 1년 반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낯설기만
하였다.
거리마다 우뚝 솟은 빌딩들은 겉모양이 비슷하여 그런 대로 익숙해졌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일상은 평생을 서울에서 보내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인호씨! 우리 저기 갈래요?"

인호와 같이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혜선은 낯선 레스토랑을 가리켰다.

"어디요? 아! 저기 산타페요?"
"네, 우리 저기 가서 돈까스 먹을래요? 인호씨, 돈까스 좋아해요?"
"그래요. 저야 소화, 배설 기능이 완벽하니까 돈을 먹은 들 이상이 생기겠어요!"
"호호! 그럼, 돈 한번 먹어봐요. 이럴 때 돈맛도 봐야지 언제 보겠어요."

계단을 올라 통유리로 된 낯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과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인호는 싫지가 않았다.
빈 테이블에 앉자마자 앞치마를 한 남자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 판을 내밀었다.

"돈까스 두개 주세요."

혜선은 종업원이 메뉴 판을 펼치기도 전에 주문을 하였고 주문을 받은 종업원은 고개를
숙이는지 인사를 하는지 분간 할 수 없는 동작을 마치고 어두운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닫혀있던 입술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가는 웃음소리가 혜선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혜선씨는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네, 지난번에 친구들과 한번 와 본 곳이에요. 그때도 돈까스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어요."
"네. 기대가 됩니다. 촌놈이..."

실내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보다는 젊은 남녀가 대부분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호는 아직 촌티를 벗지 못했는지 이런 실내가 낯설기만 하였다.
애써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도 바로 잡아 보지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인호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캠퍼스 뒷골목에 허름한 선술집이 활동 무대였고
대로변에 있는 고급스런 음식점들은 그림 속의 떡이었다.
고급스런 레스토랑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부르즈와 신분이나 부르즈와를 추종하는 골빈
사람들의 무대라고 생각을 했었다.
종업원이 두 손에 위태롭게 들고 온 돈까스는 혜선의 말대로 맛이 있었다.
하지만 인호는 돈까스가 어떤 맛이 나야 잘 요리한 음식인지는 아직 모른다.
인호가 돈까스를 먹어 본 기억은 다 합쳐도 2~3번밖에 없었으나 돈까스는 먹을 때마다
맛이 있었다.
그러나 넓은 접시에 달랑 한 조각의 돈까스가 나올 때마다 늘 양이 적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인호는 늘 서운한 배를 채우기 위해 곁들어 나온 밥과 국물 그리고 단무지 등을
남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종업원은 테이블에 놓인 빈 접시를 치우며 디저트로 뭘 마실 것인지를
물었다.
인호는 디저트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후식이라는 말보다는 품격이 있어 이곳 레스토랑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호는 자신도 부르즈와 신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리며 커피를
시켰다.
아지랑이 같은 김이 입 넓은 찻잔 위에 피어오르고 이내 커피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인호는 혜선을 처음 만났을 때 혜선의 말 중에 무심코 흘려 버렸던 단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