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인호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대 생활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넉살스럽게
털어 놓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자신 때문에 가슴 속에 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군 3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였다.
인호의 말을 듣고 보면 군대에 가면 불효자가 효자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인호는 학교에 돌아와서도 학문이 소외된 3년의 군 생활하고 원수를 진 것처럼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다른 친구들이 진로 걱정을 할 때도 인호는 내색 한번 않고 담담하게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였으며 군대 가기 전에 단골 메뉴였던 정치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늘 침묵으로 일관했다.
군대가 인호를 변화 시킨 건지 세월이 인호를 변화 시킨 건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인호는
분명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삶을 달관한 초인 같았고 일상으로부터 초월한 수도승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호는 학업에도 열중하였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쥬얼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고 시간이 날 때마다 관련 서적을 탐구하였다.
친구들은 앞으로 교사를 해야 할 녀석이 쓸데없는 디자인에 심취한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너희들이 나를 아는가! 하며 한마디로 일축하고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 후 2년이 지나 졸업을 한 인호는 교사로 임용되어 모 중학교에 미술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예상 보다 빠른 인호의 교사 임용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친구들 앞에서 인호는 즐거워하기
보다는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인호 부모님께서는 큰 걱정하나 덜었다며 좋아 하셨지만 인호는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처럼 기뻐하지도 않았다.
인호는 친구들을 배웅하는 자리에서 서울로 간다는 친구에게 다가와 나중에 서울에서
보자는 말을 하였다.
친구는 인호의 말을 듣고 서울에 한번 놀러 오겠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그렇게 하라며
헤어졌다.
그런데 그 후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인호는 무슨 오기가 발동했는지 교사직 3개월을
채우지 못한 채 사표를 내고 야반도주 하다시피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가족과 친구들은 인호의 럭비공 같은 행동에 아연실색을 하였고 인호는 연락을 끊고
잠적하다시피 학원에서 광고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친구들은 그때서야 인호가 진정 변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한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기 싫어서 잠시나마
교사직을 그만 둘 수 없었던 속내를 접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친구들은 물 열길 속은 알아도 사람의 한길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인호의 인생은 첫 번째로 바뀌고 그렇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인호는 학원에서 비쥬얼 디자인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광고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으며 아무도 모르게 꿈꿔왔던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 첫발을 내 딛은
것이다.
그리고 상경한지 일년이 지난 후에도 인호는 친구들과 연락도 취하지 않았으며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로지 걸음마부터 시작한 디자인에 충실했으며 과거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도 언제나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거나 광고 디자인에 관련된 서적들을
탐독하였으며 일상을 디자인에 대한 생각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