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진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팔짱을 끼고 서서 간장 종지 엎은 아이처럼 따라 나오는
인호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남자가 왜 그렇게 숫기가 없어요?"
".............."
"인호씨! 지금 나를 친구에게 거짓말쟁이로 만들 작정 이예요?"
"무슨 말 이예요. 거짓말이라니?"
"아까 친구하고 전화하면서 인호씨가 만나자고 얘기할거라고 했단 말 이예요."
"그러셨어요? 그럼 지금 들어가서 다시 전화할게요."
의진은 혀를 차며 사무실로 되돌아가는 인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2.침묵의 세월
차인호.
다른 사내들은 군대 갈 때 사창가에서 동정을 빼앗기고 입영을 한다는데 인호는 몸을
파는 여자들이 무섭다며 손을 잡아끄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다된 밥에 콧물을 빠뜨리듯
사창가 골목을 도망치고 말았다.
인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4형제 중 막내로 자란 탓인지 세상 물정도 모른 채 그저
부모와 형들의 뜻에 따랐고 자신도 큰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인호는 아버지의 뜻대로 J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인호는 학창시절에 남들보다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유달리 여행을 좋아해
혼자서 무전여행을 즐겼다.
결석한 강의는 가까운 친구들이 대리 출석하여 채워 주었으며 한번 떠나면 일주일이
넘도록 캠퍼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호는 불성실한 출석에 비해 성적은 좋았으며 철학, 정치면에서도 남다른 식견과
주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교에 나타나면 학업에 열중하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을
고뇌하고 설계를 하였다.
그리고 인호는 평소에 군부독재로 인해 정치적으로 후진국을 면치 못하는 우리나라
현실을 꼬집으며 늘 안타까워했으며 군부 독재가 사라져야 나라의 정통성도 회복할 수
있다며 군부 독재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군대를 가느니 차라리 도망을 할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으나 정권타도 궐기에는 참가하지 않아 인호는 교수와 친구들로부터
성실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친구들은 인호가 군대에 가게 되면 큰일을 낼 녀석이라는 걱정을 하였고 2학년을
마친 인호는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영장을 받은 인호의 행동이 염려스러워 입영전날 밤새도록 인호를 붙들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최선의 삶이라는 말로써 침묵하는 인호를
다독였다.
그러나 인호는 친구들의 염려와 달리 차분하게 모든 현실을 받아드렸고 내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 하라며 친구들이 모의한 입영전야 통과의례도 마다한 채 귀가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인호는 친구들의 예상을 깨고 3년간의 복무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전역한
이듬해 복학을 하여 캠퍼스에 나타났다.
군대를 다녀 온 인호는 모든 현실을 숙명적이며 긍정적으로 받아드렸고 학업에도 전보다
열중하였으며 좋아하는 무전여행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변한 인호를 보며 군대는 못 갈 곳은 아니라는 인식을 하였으며 자신의 일처럼
다행스러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