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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분으로 계속 일을 하는 건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언젠가 생기게 될 그의 아이들을 위한 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의 침실.
일을 하면서 이렇게 괴로워 해보긴 처음이었다.
그가 미웠다.
그녀 인생에 한번도 모자라 또다시 이런 고통을 주는 그가 너무 미웠다.
작업실을 마무리하고 집안 공사를 시작한 이후 그의 얼굴을 거의 볼수 없게 됐다.
그는 새로운 일에 몰두해 갔고 나머지 일에 대해선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기곤 예전처럼 요구하거나 트집을 잡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층의 친구 스튜디오의 공사에 이따금씩 얼굴을 내밀어 그녀만 완전히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스튜디오를 만드는 그의 친구는 여행중에 만나 의기 투합된 사이로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아 그녀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시현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아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이제 이번 공사를 끝으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준비해야 했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정운의 프로포즈에 대한 대답을 미루는 듯한 연기로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를 믿어준 데에 대한 고마움에 솔직할수 있는 만큼은
진심을 보일 작정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와 일한 2년 넘는 시간들이 먼 추억처럼 기억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직과 성실함이 몸에 밴 그에게서 얻은게 너무 많았지만 결국 돌려 줄수 있는건 상처와 모욕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랜만에 대전에 사는 언니와 연락을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언니의 불평을 들으며 갑자기 조카들과 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 나두 언니한테 가서 살까? ]
[ 무슨 소리야? 회사는 어떡하구 ]
[ 그냥... 나 재주 많잖아. 거기서 조그만 인테리어 소품 가게하나 내서 언니랑 같이 하지 뭐 ]
처음엔 재밌겠다고 금방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던 언니가 그녀의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 회사에 무슨 일 있니? 그 동안 잘나간다고 좋아하더니 갑자기 왜 그래? ]
[ ... 조금 지쳐서 그래...걱정하지마 조만간 한번 내려갈게 ]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