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한참 벨을 누르고 있자니, 백발의 노인이 문을 열어준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전 317동에 사는 사람인데요. 혹시 선생님께서 작년말까지 노인회 회장을 맡고 계셨다는 장회장님이세요?"
"예...제가 장회장 맞긴한데...무슨일로?"
"저...잠시 들어가서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이런...제가 깜빡했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사람좋은 웃음으로, 낯선 나를 집안으로 스스럼없이 들여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이유없는 믿음이랄까... 다행이야, 이분에겐 편안하게 여쭤볼 수 있겠어...
"저... 이 아파트에서 아주 오래 사셨다면서요?"
"오래 살았죠...노인네가 살기엔 괜찮은 동네니까요. 허허허"
"저 다른게 아니구요...저희 집이 317동 602호거든요."
동호수를 듣는 순간 노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저희 집에서 이상할 정도로 사고가 많았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리고 요즘들어 아이가 자꾸 다치기도 하구...불안한 마음에 찾아왓습니다.혹 장회장님이 아시는게 더 있으신지 알고 싶어서요."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이가...."
"예, 딸아이가 하나 있어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랍니다... 제가 왜 이런 질문 드리는지 아시고 계신것 같으네요."
"왜 그집에는 꼭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 이사오는건지...쯧쯧.."
"내 한번은 이 근방 부동산에 다 들러서 '아이가 있는 집들은 소개도 하지말라'고 한적도 있었다우. 그런데 사람들이 한결같이...나를 노망든 노인네 보듯이 하면서..이상한 소문돌면 가뜩이나 싸게 내놓는 집인데다가 같은 단지 아파트 가격 다 떨어진다고 우습게 흘려버리더라구요. 뭐 그렇다고 내가 미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일이 한두번이었어야지 원... 그것도 다 원한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려"
원한이라니?
노인이 마지막에 흘려버리듯이 뱉어놓은 단어하나가 내 심장을 뒤흔들이 시작했다.
"원한이라니요? 무슨 원한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그게 한...팔,구년전쯤이던가? 내가 노인회 회장을 맡기전에 아파트 발전 선도자문위원인가... 뭐 그런걸 맡고 있었던 때랍니다."
노인은 참으로 오래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눈을 지긋이 감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602호는 유난히 경비실로 항의전화를 많이 오게 만드는 가정이었다고 했다.
걸핏하면 싸우는 소리에 물건 깨지는 소리, 울음소리....
"그집 아버지라는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이었죠. 처음엔 그냥 부부싸움이 잦은 집이려니 했는데..."
한번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경찰도 어쩔 수가 없었죠, 그냥 조용히 하라고 경고할 수 밖에는...매번 그리 헛걸음하다보니 나중에는 경찰도 오지 않습디다. 나중에는 아파트 주민회의에서 안되겠다 싶어 자문위원들로 하여금 그 집을 방문하게 했죠. 그때 난 그 아이를 처음봤습니다."
그 아이...이름이 희윤이라고 했다.
작고 여윈 몸의 여자아이..나이는 열살이라는데, 보기엔 일곱살 정도로 보일정도로 외소하고 깡마른 아이.
"같이 갔던 사람들 다 놀랐죠, 애가 방구석에 앉아 웅크리고 있는데 여기저기 상처가 왜 그리 심한지....휴우~~~"
아버지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는데, 집안은 엉망 그 자체였단다.
성한 살림도 없고, 여기저기 부수고 깨뜨린 흔적하며...
"희윤이란 아이...엄마는여?"
"아이 엄마도 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상처도 그렇고, 여윈것도 그렇고...몇 마디 나눠봤는데, 그 아버지란 사람 도대체 얘기가 통하지 않습디다. 남의 가정사에 뭔 관심들이 그리 많냐는 식이었죠.
안되겠다 싶어 좀 젊은 사람들이 아버지란 사람한테 술한잔 하자고 데리고 나간 사이에 나랑 몇이 남아서 애 엄마랑 얘기를 했어요...그런데.."
희윤이 엄마는 아이라도 구해달라고 사정했단다.
이렇게 맞다가는 아이가 제명대로 살수 없을 듯하다고..불쌍한게 무슨 죄냐면서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자신으로선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는 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당시에는 저희로선 아이를 구할 도리가 별반 없었답니다. 그냥 한번 위로방문이나 한 셈이 된거죠. 이웃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날은 비명소리가 더 컸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한테 술을 먹이는게 아닌데...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혼을 하도록 권유해보시지 그랬어요."
"그것도 생각을 해봤답니다. 법원에 소송을 걸려고도 생각했는데, 남편이란 작자가 협박을 했던가봐요. 이혼을 해도 아이는 놓고나가라고, 아이까지 데리고 나갈려들면 그땐 다 죽여버린다고.....애 엄마가 어찌나 아이를 끔찍히 생각하던지, 다른 사람같으면 아마 당장 나살고보자고 애 버리고 나올만도 하더만..."
"그 아빠란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거죠?"
"원래 처음부터 그리 나쁜 작자는 아니었나보더라구요,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희윤이 위로 오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때는 그 아버지도 그리 포악하지 않았대요. 그런데 희윤이가 태어나고부터 문제가 생겼다더군요...애가 선천적으로...."
"뭐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