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여자들이란...."
난데없이 들려온 남자 목소리.
그 무덤은 온전한 우리들만의 아지트는 아니었다.
헐렁한 멜빵바지에 왜소한 체격, 165센티나 될까말까한 작은 키에 눈빛만이 살아있던 남자.
그 남자는 이젤과 화구통을 챙겨 무덤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 남자가 무덤의 주인인냥.......
우린 너무 놀라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눈부신 봄햇살 때문이었을까?
난 한순간에 그를,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철없던 시나리오의 남자 주인공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사랑과 가슴아픈 실연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문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
내가 흠모하던 지도교수님의 이러한 취중발언으로 인해 이미 오래전에 내 시나리오는 결정되어졌고 난 그 대상을 아주 멋지게 찾았던 것이다.
-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열정적인 사랑과 가슴아픈 실연.....-
이것이 내가 바라던 첫번째 사랑의 테마였다.
난 그때까지 사랑이란 걸 해보지 못한 상태였고, 해서 나의 객기어린 사랑은 철없는 계획하에 무작정 시작되었다.
그 남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 남자는 회화과 졸업반이었다.
내 선택이 헛되지 않게 그 남자는 적당히 시니컬했으며 다분히 예술가적인 기질을 보였다.
항상 어두웠으며, 유난히 날카로운 콧날로 인해 더욱 신경질적이고 예민해 보였다.
그 첫만남 이후로 강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 남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 관심을 보였고, 무수한 사랑의 편지로 내 맘을 전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내 레이더망안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학교에서든 화실에서든 그는 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요샛말로 영락없는 스토커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