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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사람이 변해도 그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미순인 그 사람이 자기 남편이 아닌 것 같다고 했어. 말투도, 사고 방식도, 눈빛까지도 그
여자를 닮아 가는 것 같다고 했지. 자신을 배신하고 딴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긴 해
도 그렇게 모진 남자는 아니었는데 정말 몸서리 처지게 변해갔다고 했어. 처음엔 미순이가
그러고 사는지 나도 몰랐어. 자존심 강한 미순인 나에게조차 털어놓질 않았었거든. 각자의
삶을 살다 보니 전처럼 그렇게 자주 못 만났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할 기회가 없던 던 것인
지도 모르지만. . . 어쨌든 아주 오랜만에 둘이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날 난 무척 오랜만에
보는 미순이가 반가워서 학교 때 이야기며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하며 혼자 서만 한참을 떠
들었던 것 같아.

문득, 나만 떠들고 있다는 걸 알았고 미순이가 우울해 보인다는 걸 알았지. 미순이가 하도
우울해 보여서 왜 그러느냐고 자꾸 물었더니 감추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봇물 터지듯 쏱아
놓기 시작했는데, 정말 너무 가여워서. . . 얼마나 혼자 힘들었으면 그 자존심 강한 애가 이
런 일들을 내게 죄다 쏱아 놓았을까,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그 김상덕이란 인간을 죽이고
싶었어. 봉순의 눈에서 살기가 어리는 것을 보고 철우는 섬찟함을 느꼈지만 그냥 그로 봉순
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미순이를 위해 난, 영화도 보여주고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도 하며 그 아이의
분노를 삭힐 방법을 찿아 보려고 나름대로 애썼어. 허지만 미순일 치료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란 걸 알았고 그 남편을 되돌려 놓기엔 뭔가 많이 삐그덕 거린다는 걸 느꼈지. 어
쨌든 난 미순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며 마음이 위로 될 수 있는 말들을 아끼지 않았어 뭔
가 그 아이에겐 탈출구가 필요 했으니까. 허지만 그 아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자신이
더 흥분되고 화가 나서 정말. . .

미순이 남편은 전에는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돈이 생기면 모두 미순 에게 같
다주고 용돈을 미순에게 타다 썼다는데, 그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집안에 소용되는 돈은 꼭
필요한 돈만을 지원했다는데 그것도 목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늘 만원, 이 만원, 푼동만을
주면서 살림을 헤푸게 한다느니 돈만 주머니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느니 하며 미순일 경멸
하고 모욕하는 말들을 서슴치 않았데.

경제적으로 힘든 건 모든 여자들이 그렇겠지만 남편의 확고한 사랑이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
만 있으면 능히 견뎌 낼 수 있는 부분이야  허지만 도저히 자신의 남편의 머리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 튀어나오고 사건들이 벌어지는 데엔 저 사람이 날 사랑한다던 사람인
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낯선 사람과 사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어.

니가 날 위해 해준것이 뭐냐, 너희 친정 식구들은 왜 다 그모양이냐해하며 멀쩡한 사람들
트집을 잡고, 그 여자와 함께 놀러가서 먹을 도시락 싸게 하고. . . 집으로 데려와 함께 일을
한다는 핑계로 헤헤거리며 미순 에게 그 여자의 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하고, 온 몸에 그녀
의 손톱자국을 남기고 들어와 일부러 미순 에게 시위하듯 보여주고, 미순 에게 참을 수 없
는 모욕의 말들을 서슴없이 해대고, 상스러운 욕들로 남들 앞에서 창피와 무안을 주고. . .
집에는 쌀 거리가 없어도 외박하고 여행하고 다니며 돈을 물쓰듯하고, 오죽하면 시집식구나
남편의 흉이라곤 볼 줄 몰랐던 미순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겠니. 여자는 말로 스트
레스를 푼다더니 정말 그랬어.

아마 그나마 나에게라도 털어놓았으니 망정이지 혼자서 간직하고 끙끙거렸다면 미순이 가슴
이 새까맣게 다 타 버렸을꺼야. 미순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쏱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땐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들 뿐이라서, 처음엔 나 자신도 믿질 못했어. 허지만 무섭게 몸이
말라가고 웃음을 잃어가는 그 모습에서,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지.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오로
지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으며, 자신의 마음을 삭이는 것이 그 아이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결 방법이었는데,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려웠어. 그래도 미순 인 늘
내가 자신의 입장에서 내가 함께 분노하고 자신의 남편을 욕하기보다는, 남편의 입장에서
그를 변명해주고 "네가 잘못 한 거다. 네가 참아라. 네가 어리석었다 ."고 말해주길 원했어.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남편이 그럴 만했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찿아 내고 싶어했거든. 말도
되지 않는 그런 대화 속에서 미순인 위로 받는 것 같았어. 너무 가슴이 아팠지. "너도 아이
들도 나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나한테 자식은 없다, 나가버려라!" 고 소리치며 밥상을 업고
아이들 앞에서 처참하게도 미순일 때렸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너무 기가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봉순을 보며 철우가 불끈 쥔 손을 부르
르 떨었다. 정말 인간으로서 견뎌내기 힘든 일들을 그동안 미순이 겪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순의 상황을 봉순으로부터 전해 들으며 철우는, 그와는 경우가 좀 다르기는 했지만 한 여
자의 사랑하는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등돌려야 했던 지난날
의 자신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봉순아 정말 내가 너에게 못할 짓을 했다. 정말 미안해, 이번 미순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많은 여자들과 만나 이야길 나눴어. 여자들에게 남자의 배신은 정말 상상 할 수 없을 정도
의 아픔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지. 그건 남자들이 열정과 성의를 다해 자기가 이루
어 내려 매달렸던 일에서 실패했을 때의 좌절감보다도 더 큰 것 같았어. 가볍게 생각하기엔
너무도 큰 상처로 남게될. . . 봉순아. 나의 철없는 행동이 널 얼마나 아프고 쓰리게 했을지.
. .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정말 미안해."

"아니야, 그 때 나도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네가 그토록 용서를 빌었는데도 내가 받아 주질
못 했었잖아. 오히려 널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어리석었던거야. 결국 사랑을 가꾸고 지키지
못한 건 네 탓도 있긴 하지만 내 잘못도 있는 거야. 그때 널 이해하고 받아 들였더라면 우
린 지금 이렇게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진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 그때 정말 힘들었었
어. 이성과 감성이 내 안에서 따로 따로 등돌리고 앉아 나를 마구 휘젖고 있었거든. 어려서
부터 늘 넌 내게 든든한 언덕 같은 사람이었지, 늘 보호해 주고 아껴주고 그저 옆에만 있어
도 아, 이 사람이 날 사랑하고 있구나를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날 위해선 무조건 뭐든 다
해줄 것 같은 사람, 마치 이 세상으로 날 아껴 주기 위해 태어 난 것 같았던 사람.

날 만나는 것을 지상최대의 낙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던 사람. 자연히 널 믿고 의지하게 되
었고 네가 나에게서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하게 되었었어. 그리고 널 만난 걸 신께 감사하면
서 너와 한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믿었고, 사랑과 행복만을 내게 보여주는 그런 널 나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어.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 언덕이 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
을 때, 그 버려진 느낌 아마 넌 알지 못 할꺼야. 사람이 사람에게 버려진다는 건 정말 살점
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한 두려움이고 절망 이란걸. . .

허지만 어쩌겠니. 그렇게 널 의지하고 사랑했지만 네가 다른 사람에게 가겠다는 걸. 난 날
위해 네가 함께 하고 싶은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말할 수 없었어. 봉순 의 두 눈에서 눈물
이 흘러내렸다. 잠시 울음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은 봉순인 철우를 바라보았다. "그때, 넌
정말 절실해 보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절실히 원한다는 걸 옆에서
지켜본다는 거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니?. 난 그때 그 고통이 너무 힘들어서 너한테 버림
받기 전에 내가 널 버렸던 거야. 난 겁쟁이었거든, 그때 그 상황에서 널 다시 나에게 되돌려
놓을 자신도 없었지만, 내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 걸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근데 시간이 지나
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 사랑이라는 거 그거 아주 웃긴 거라는 생각 말이야.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그 말도 사랑하니까 죽어도 놓아주지 못한다는 그 말도 전부 위선
일수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진 자신들의 욕심일 뿐 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들에겐
나름대로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참 쉽게 색깔이 바뀌어
간다는 걸 알았지. 사람의 감정이라는 거 손바닥 뒤집듯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도록 참사랑
에 성공하는 사람들, 생각 보단 많이 있질 않았어. 남자들은 선이 굵은 사랑을 생각하지만
여자들을 사소한 것에서 사랑을 느껴. 밥 먹을 때 수저 집어주고 차 다니는 길에선 안 쪽으
로 서게 하고 비오는 날 우산을 둘이 함께 받게 되었을 때 자신은 다 젖어도 여자가 비에
젖을까 봐 우산의 절반이 넘게 여자 쪽으로 기울여 주는, 그런 자상하고 섬세한 마음씨 . . .

같이 갔던 찻집에서의 대화,
둘이 함께 먹었던 솜사탕.
사랑의 눈빛,
자신을 바라 보면서 웃고 있는 모습등
그런 것들을 사랑이라 믿고 그 모든 것을 배려하는 남자의 사랑에 목숨거는 여자들과 달리,
사랑을 이리저리 옮기고 싶어하는 남자들의 본능이 삐그덕거려, 결국 어그러져 버리는 사랑
들. . . 너를 보내고 난 후 난 한참동안을, 사소하지만 사랑이라 믿었던 그런 추억들을 지워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사랑을 잃어서 아파하고,
그 기억을 지우기위해 더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고. . .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
어 그래서 난 변질되는 사랑보다는 우정이나 일에서의 성취감을 더 비중 있게 내 생에 끼여
두기 시작했어. 덜 외로웠지. 어차피 본능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것이 여자라서 사랑을 포기
하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

내가 겪어 보았기에 미순의 고통스러움을 난 잘 알수 있어. 미순일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하지. 도데체 사랑이 뭐길래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을 버리기도하고 고통속에 빠져드는
것 일까하고. . .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난 아직도 사랑을 꿈꿔. 여자란 정말 어리석은 존
재 인가봐." 봉순의 말을 들으며 한동안 말이 없던 철우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남자들이 어
리석은 거지. 고귀한 사랑을 지켜주고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미처 깨닫기 전에
사고를 치고 마니까, 그러면서도 상대 여자는 꼭 나를 버리지 않을 꺼란 믿음을 갖고 있거
든.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인 줄 알면서도. . .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져 생각하기 이전에 서로
삶에서 동반자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없을 텐데... 남자들은 왜 많은 여자를 겪어야만 자신이 영웅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
도 남자지만 참 모르겠어.

그저 한 여자만 알고 이 세상을 마감한다는 건 너무 자신이 무능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
게 되거든.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결혼 전 많은 여자들을 사귀고 자랑하고 그러면서 우쭐해
하고. .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않으려 하거든. 물론 확실한 자기
인생관이나 사랑관이 있어서 한 여자만 지순하게 사랑하는 남자도 있긴 하지만 어쩐지 그런
남자들은 남자의 세계에선 인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돼 버린 건 사실이야. 세상이 바뀌
면서 사고 방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그건 남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인가봐, 본능을 자
제할 수 있는 남자가 많아 질 때 세상에 상처받는 여자들도 줄어들겠지. 허지만 남자의 마
음에 자리 잡고 않는 여자는 단 한사람 뿐이야. 나머진 다 지나가는 사랑일 뿐이지. 그 사람
이 누구인지는 남자 본인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과 같이 고생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아이들을 낳고 생활의 터전을 함께 일군 조강지처를 자신의 유일한 여자
로 생각하고 있지.

간혹 예외가 있긴 하지만 동반자와 느끼는 사랑은 그저 이성으로 느끼는 그런 사랑과는 본
질 적으로 다른 거거든. 책임을 함께 하는 그런 사랑, 그게 진정한 사랑 아니겠니. 봉순아,
너도 그만 옛날 일로 아파하지 말고 네 자신을 사랑해 봐, 그리고 아껴 줘. 네가 너를 사랑
하지 않으면 아무도 널 돌아보지 않게 되는 법이야. 그리고 너와 함께 뿌리를 내릴, 함께 책
임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그런 사람을 만나서 행복 해 졌으면 해." "그 말이 무슨 말인
지 알고 있어. 고마워, 지나가는 사랑이 아닌, 뿌리 내리는 사랑. 나도 곧 하게 되겠지.그리
고 그 뿌리내리는 동안 함께 힘들고 괴로워도 사랑으로 이겨내는 많은 사람들처럼 미순이도
그렇게 되길 바래.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미순이 갠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더군다나자신의
목숨 같은 남편을 죽일 그런 애가 아니야. 그게 미순이가 저지른 일이라고 결과가 나온 다
면 그건 니가 실수하는 거야."

봉순과의 지난 사랑을 뿌리 내리지 못한 지나간 사랑이라 말하며, 진정한 사랑을 찿으라 말
하는 철우 앞에서, 봉순은 사랑이라 믿으며 아파했던 지난 시간들이 결국엔 자신만의 미련
이고 욕심이었을 뿐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
면서 봉순은 눈앞이 흐려져 오고, 참았던 눈물이 뺨위로 흐르고 있었다. 철우는 자신의 사랑
을 잊지 못하고 지난 긴 시간을 그 사랑의 상처로 인해 혼자 아파하며 지내 왔을, 봉순에게
자신이 얼마나 모질고 모진 인간인지를 스스로 자책하며, 결코 여자에게는 사랑이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녀가 진정한 사람을 만나 행복해 지길 바랬다. 장난처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없이,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