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808

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철우는 사건이 난 일산 현장에 도착해 갈대밭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현장 주변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살인이 일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타 지역에서
이미 살해하여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은 아닐까. . .
그렇지 않다면 모든 상황이 그렇듯 정갈 할 수가 없었다.
반항한 흔적도 없고 . . .

차가 서 있었던 자리에 오자 철우는 바퀴 자국을 살펴보았다. 풀밭위로 난 바퀴 자국은 그
저 평범했다. 그렇다고 주변에 발자국을 발견 할 수도 없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범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철우는 바바리코트에 손을 깊이 꽃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죽은 두사람의 목에 깊이 패인 상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한동안을 풀밭에 쭈그
려 트리고 있던 철우는 깊은숨을 내쉬며 일어서더니, 보폭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차쪽으
로 다가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지금쯤 팀원들은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 미순이 의 진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철우는 어쩐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미순이 남편을 죽였다는 말
을 남긴 채 병원으로 옮겨진 후, 기억상실증으로 더 이상의 상황을 미순으로 부터 들을 수
없게 되자, 철우는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하며 수사를 진척시키고 있었다. 도데체 미순이 같
은 애가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봉순으로 부터 전해 들은 미순과, 자신이
아는 미순은 도저히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자수는 뭘까? 사건의 상황은 뭔가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음을 철우는 형사특
유의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미순의 자수는 그를 미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보통 치정
관계에서는 생각지 못한 돌발수가 늘 따르게 마련이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가
깊고, 성격자체가 대범한 미순의 성격상으로나 주변의 증언들은, 도저히 미순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철우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어쨌든 철우는 심정이 착찹하기만 했다. 현장을 떠나 철
우는, 죽은 여자의 사무실 사람들 중 친하게 지냈다던 동료 한사람과 오후에 만나기로 되어
있기에 그 쪽으로 차를 몰았다. 홍대 앞의 카페에 도착해서 카운터에서 확인하니 그 여자는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쁘신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며 철우 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손반장 님이시군요. 좀더 나이가 지긋하신 분인줄 알았었는데. . ."
여자가 철우 에게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네, 커피요."
"여기 커피 둘 주세요"
종업원에게 차를 시키고 나자 철우 가 여자에게 물었다.

"괞챦으시겠습니까?"
"물론이예요, 오히려 누군가에게 가슴속의 답답함을 털어내버리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
구. . ."
여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한 우희 씨와 김 상덕 씨는 언제부터 가까워진 사이였습니까?"
"취재 때문에 처음 김 상덕 씨가 운영하는 샾으로 우희가 방문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우
리 잡지에 김 상덕 씨가 패션에 대한 칼럼을 맡아서 쓰게 되었는데 둘이 사적으로 가깝게
사귀게 된 것이 한 이년 되었을 겁니다."
"일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 졌겠군요."
"그런 셈이죠."
"김 상덕씨가 유부남이었다는 걸 우희 씨는 몰랐던 모양이지요?"

"아니, 알고 있었어요. 김상덕씨가 유부남이기 때문에 우희가 접근했을 거예요. 우희는 이상
하게 유부남들에게 집착했어요. 특히, 부부사이가 믿음이 깊고 다정하다 느끼면  남자쪽을
그냥 놔두질 못했죠. 꼭, 자신에게 빠지게 만들었어요.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생겼지만 우희는 그걸 재밌어 했어요. 죽은 사람을 두고 이런 애기는 좀 뭐하지만 그 앤 질
나쁜 악마 같았죠."
"그럼 김 상덕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요?"
"물론 아닐 꺼예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한때는 사랑했을 부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몰염치한 남자들을 무척 경멸했으니까요."

"그럼 단순히 자신에게 빠져들게 하려고 남자들을 유혹했단 말입니까?"
"네, 그랬어요. 그 과정에서 그 앤 우월감을 느꼈죠. 그래서 상대 여자가 남편의 외도를 눈
치 챌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증거를 남겼거든요. 그러면서 두 부부가 다투는 가운데, 남자가
파렴치하게 변해가는 모습과, 그 때문에 상대 여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걸 즐겼죠. 사람에 따
라 반응도 가지각색이었어요." 
여자는 담배를 길게 한모금 빨아들이고는, 다리를 꼬고 의자등받이에 깊숙히 기대 앉아 말
을 이었다.

"여자들의 반응은 이해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남자들의 태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더군요. 대
부분의 남자들은 집안에서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부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보다는,
새로운 여자를 정복하는데 혈안이 돼서 부인을 무시하고 새여자를 위해 뭐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남자들, 참 우습데요. 뻔히 바람이 났다는 걸 다 알게 되었는데도 부인 앞에선 끝
까지 아니라고 우겨대는 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어요. 여자의 입술이 비웃음으로 묘하게
일그러 들었다.  어쨌든, 우희는 한동안의 쾌락을 위해, 가정과 자신이 파괴되는 줄도 모르
는 남자들의 우매한 모습과, 믿었던 자신의 남편에게 배신당하며 울부짓는 여자들을 보며
속으로 한없는 쾌감을 느낀 것 같아요.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은 없다는 걸 매번 확인하며
괴로워했어요."
"허, 그것참."  철우는 기묘함을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그럼 김 상덕씨 말고도 사귀는, 다른 여러 사람이 있었겠군요."
"네, 한 사람만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어떨 때는 서너 사람과 중복해서 만나기도 했
으니까요. 저희 회사에서 하는 일이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내
는 일이라  만나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계층도 다양해서 우희가 만나는 사람들도 각양 각색
이었죠. 모두들 거죽으론 젊쟎아 보였지만 남자의 본능을 자제할 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은
별로 없었지만요."

"정확히 말해 우희씨는 어떤 여자 였나요?"
철우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여자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