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나뭇잎들이 차바퀴 밑으로 흩어지며 가볍게 날고 그 위를 밟고 차가 섰다. 운전석 옆자리의 문이 열리자 늘씬한 다리에 가는 발목을 갖은 여자의 발이 하이힐을 신고 땅을 밟으며 내려서고 있었다.
잠시후, 차의 시동이 꺼지고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투박한 랜드로바 에 밤색 골덴 바지를
입은 커다란 발 하나가 땅을 딛고 따라 내렸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발이 낙엽 위를 걷다
가 벤취 앞에 멈춰 서더니 여자가 가느다란 두 발목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곳에 앉았고 뒤따
르던 남자도 그 여자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발 밑으로 바람에 흩어지듯 낙엽들이 구르고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괞찮아?"
"응, 나는 괞챦아, 당신은?"
"나야, 뭐. . ."
"후회 안해?"
"당신이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미안해. 정말 너무 미안해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용서받을 길이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너
무 마음이 아파."
"그러지마. 다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이니까. 그런데, 당신 후회하고 있니? 그러지 않을 자신
있다고 했쟎아. 혹시, 그 여자한테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야?"
"아니, 그 여자에게 느끼는 죄책감 같은 건 없어. 그 앤 한 여자에게 상처를 줄줄 뻔히 알면
서도 의도적으로 그 남자를 가까이했어. 자신의 행동이 한 여자를 얼마나 고통 속으로 빠져
들게 하는지 충분히 알면서도 그걸 즐겼지"
"꼭 여자 탓만은 아닐 수도 있쟎아"
"물론이야.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 . .허지만 여자가 마음먹고 한 인간과
가정을 파괴하려 든다면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이 세상에 없어. 그 앤 권태기에 들어선 중
년 남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 할 줄 아는 중
년 남자 킬러였어."
"그 여자를 만난 일이 있어?"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난 남편을 사랑했거든, 그여자를 만난 후 마치
하얀 순백의 천이 검정색으로 물들어가는 듯, 변해가는 남편을 보는 일이 힘들었어 그래서
그여자를 만나 사정했었어. 제발 내 남편에게서 멀어져 달라고. . ."
여자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듯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잔 날 비웃었어,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픔으로 미쳐가고 힘들어
하는 걸 즐겼지,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둘의 사랑에 문제가 생
긴 건 자기가 끼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마음이 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둘
의 문제라며 자신은 정당한 체 당당했었지.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
나빠진 상황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는 모양일텐데. . . 그 나
빠진 틈을 이용해서 둘이 회복 할 수 있는 기회를 영 망가트리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이용
했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없고 모두 상대의 원초적인 잘못 때문인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
해서, 상대방 여자를 비참하게 꺼꾸려트릴 줄 아는 교활한 아이야,
부르르 떨려오는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듯 여자는 큰 숨을 몰아 쉬었다.
불륜의 관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듯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됐다는 그런 구차한 변명을 그 앤 하지 않았어. 적어도 내 앞에서는. . . 오히려 임자 있는
사람 걸 빼앗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식이었지. 남자가 자신의 꽤임에 빠져 미련하게도 자신
이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할, 가족들에게 상처 준다는 사실조차도 부정하고, 자신의 욕심 때
문에 이뤄온 모든 것을 망가트리고 부숴 가게 만들면서도, 마치 남자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위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어.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소중한 이들에게 상처를 깊이 주고 난 후, 더 이상 그들에게 되돌아 갈 수 없을 때 그 앤
그 남자를 버렸어. 무서운 아이야.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가, 자신을 갖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버리게 만들어 놓고, 마지막엔 그 남자를
버려 폐인이 되도록 만드니까."
"이상스러운 여자군."
여자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여자를 알아?"
"무슨 뜻이지?"
"여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목숨도 버리지만 그 남자가 자신을 배신하면그
남자를 죽일 수도 있어."
"여자가 약하다는 말 틀린 것 같아"
"여자를 거칠게 만드는 건 남자가 무능하기 때문이고, 여자를 독하게 만드는 건 남자가 배
신했을 때 그래, 남자의 믿음에 대한 배신은 여자를 독하게 하지. 그러고 보면 남자들은 너
무 어리석어, 정복하고 싶다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서 여자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것을
잃는 다는 건 전부를 다 잃는다는 것이란 걸 모르니까. . . 여자는 잘 쓰면 가장 귀한 약이
되지만, 잘 못 간수하면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는 거야."
". . . . . . . .,"
"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하고, 어리석은 것 같지만 가장 현명하고, 남자의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여자야."
"결국 하나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그 하나의 여자로 인해 다 갖게 되겠
군."
"맞아, 여잔 남자에게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 남자를 위해 자
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니까."
"이제, 어떻게 할 꺼지?"
"당분간 평상시처럼 움직이면서 좀 쉬려고 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거든."
"그 남잘 많이 사랑했었나봐,"
여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어진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잠시 남았다가 사라졌을 뿐이
었다.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신이 더 아플 텐데 그게 더 걱정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당신은 괞챦아? 나 때문에. . ."
용서를 구하는 듯한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남자가 여자를 따듯하게 감싸 않았다.
"사랑해!"
남자는 여자의 귓볼에 키스했다.
"내가 징그럽지 않니?"
"모르겠어.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난 그냥 네 옆에 있으면 행복해져"
"정말?"
"당신을 갖게 되서 정말 기뻐, 이 일로 겨우 당신의 마음을 갖게 되었군. 이제 당신은 내 꺼
야. 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 절대로. . . "
남자의 품안에 쓰러지듯 안긴 그 여자는 너무 창백해 보였다.
"여잔 남자가 죽었을 때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이 무너지지만,, 남자의 사랑을 잃었다는 걸
알았을 땐 그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돼. 차라리 남자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그걸 모르고, 남자의 바람은 있을 수 있는 유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자를 가장 비참한
상태로 모는 것이 상대방의 배신, 즉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그것이 한 여자를 얼마나
냉한 인간으로 만들고 모질게 하는지, 얼마나 인간으로서 큰 죄를 짓는 일인지 알아야 한다
구. . . "
"이제 그만해, 다 끝났어."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난 자신들의 울타리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평생을 속죄하
며 살아야 하니까. . ."
강가에 노을이 핏빛처럼 물들어 가고 여자와 남자는 그 아래 침묵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