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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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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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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웬지 사치스럽게 느껴져 봉순 인 늘 시장을 이용하곤 하지만, 올케들 생일만큼은 봉순인 백화점으로 갔다. 그만큼 올케들을 챙겨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봉순 인 큰 올케의 생일엔 둘째 올케의 선물까지 똑 같은 것으로 함께 준비하고, 둘째 올케의 생일엔 큰 올케의 것까지 똑 같은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 두 사람 다 동생들을 믿고 이씨 문중에 들어와, 아무 조건 없이 살림을 일궈 가는 고마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백화점에서 나와 승용차에 올라 막 출발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봉순 이니?"
"어, 미순 이구나, 무슨 일 있니?"
"아니, 그저 안부가 궁금해서. . . 지금 뭐해?"
아무 일 없다는 미순 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미순 의 목소리는 몹시 우울하게 들렸다.
"지금 엄마네 집으로 가는 길이야, 오늘 큰 올케 생일이거든"
"그렇구나, 그래, 그럼 잘 갖다와. 그리고 행복해-"
"뜬 금 없긴, 언젠 내가 뭐 불행했다니? 근데,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일은 무슨 일, 내 걱정 이젠 그만해도 돼."
"그래, 제발 걱정시키지 말고 너야말로 행복해야지."
"그래,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난 늘 네가 내옆에 있어줘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 .알지?"

미순 이의 전화를 끊고 나자 봉순 인 웬지 불안했지만,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평창동로
차를 움직였다. 스무살에 만난 남편과 오 년 남짓 연애를 하다가  결혼한 미순이는, 무척 행
복했었다.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던 남편과의 데이트 시절부터,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
적인 것을 더 중요시했던 그녀는, 주변의 조건보다는 그 남자의 사랑을 믿었었다.
낙천적인 그녀와 이지적인 그녀의 남자는 잘 어울렸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리란 믿음이 갔었
다.

둘은 아들과 딸을 이년 터울로 낳고 결혼생활을 십 오 년간 지속해 오면서도, 그 흔한 권태
기도 겪는 것 같지가 않았었다. 결혼 당시 월세로 시작한 살림방은 십 오 년이 지난 지금까
지도 변변한 잡 한 칸 없는 상태이건만 미순인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의 일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남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더욱 극진해 질 뿐 이었다.
사랑이란 저런 것일까, 남들은 결혼을 하려면 사랑보다는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던데, 미순
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착해서 미순이 속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엄마를 닮아 낙천적인 성격인지라 어려워 보이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늘 밝았다.

미순이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그 남자는, 늘 일이 풀리지 않아 어려운 살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얄미울 정도로 씩씩했었다. 기가 죽을 만도 하건만 기가 죽기는
커녕 더욱 기고만장해 보이는 것이, 미순이가 얼마나 받들고 잘 다독거려 주는지 짐작이 가
고도 남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이기적이라 할만큼 생활을 돌보지 않고 불철주야 뛰는 그런
사람이라, 미순이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 저럴 수 있을까 하고 미운 마음이 들다가도, 그 남
자만을 해바라기 하는 미순을 보면 "어서 잘 되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바뀌곤 했었
다. 남들이 어찌보건, 둘은 없는 가운데 넉넉함과 행복을 찿아 내는 마술사 같았었다. 그런
데. . . 그 둘 사이에 한 여자가 끼어들면서부터 미순이의 삶은 뒤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픔으로 분별력과  빛을 잃어가는 미순의 모습을 보며, 그 남자의 배신에 놀라움과 황당함
으로 치를 떨었지만, 봉순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더욱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 . ."
평창동으로 향하는 봉순 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지만 애써 떨치려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
에선 7시 뉴스가 진행중 이었다.
"어제 오후 9시경 경기도 일산의 야산에서, 신원미상의 남자와 여자가, 차안에서 철사줄로
목이 감긴채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원한관계로 보이는. . . " 봉순 인 채널을 돌렸
다.

시끄러운 락이 쏱아 지는 채널에 주파수를 고정시킨 봉순인, 어두움에 묻쳐 가는 시내를 뚫
고 악셀을 밟았다. 북악 스카이웨이 쪽으로 달리다가 팔각정 앞에서 차를 멈춘 봉순 이는
눈아래로 펼쳐지는 야경에 눈을 멈추고 서서 심호흡을 한다.
아까 라디오에서 잠깐 들었던 살인사건과  미순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며
맴돌았던 것이다.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말없이 서있던 봉순 이의 뺨으로 까닭 없는 눈물이
주르르 굴러 떨어진다.

미순이도 남편과 그여자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괴롭겠지? 아니야, 그 바
보는 그러기보다는 남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물러나 줘야 한다고 생각할꺼야. 그 남자가
원한다면. . .. 아마도. . . . 눈이 움푹 패이고 가죽만 남은 미순의 얼굴을 떠올리며 봉순 인
부르르 몸이 떨려 옴을 느낀다. 평창동 에서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