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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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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여자 2001-02-10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몸을 뒤척거리고 있다.
좀 더 아이가 푹 자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으로 아이를 따스한 품안에 잠시 감싸안고 등을 쓰다듬어 준다.
이곳 외국생활에서 우리 가족중에 가장 잘 적응하는 이는 바로 이 아이인듯했다.

남편이야 유학생활까지 십년이 넘어가도록 남의 나라에서 살건만 늘 한국이란 조국을 그리워했고,그래서 어서 시간이 흘러 그 조국에 가서 자신의 터를 확실히 잡고서 살아가길 언제나 꿈꾸는 사람이였지만 , 난 그렇게 막연하게 그리운 조국도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원래가 한번 떠나면 두고온 것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던 나였던이유로.

어릴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그것이 늘 엄마의 불만이였고 걱정거리였다, 난 유복자였다.
유복자들이 다 그렇듯 난 한번도 이세상에서 "아버지"란 사람을 가져보지 못했던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누구나 할것없이 난 언제나 가여운 아이가 되었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난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왜 그런 평가를 사람들이 내리는지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알수있었다.

아므튼 난 어릴때부터 그다지 눈물이 없었다고 했다,또 아파본적도 별로 없었고... 어딜가든 혼자 다녔고 혹시라도 흔하지 않은 가족의 나들이라도 있을때면 흔쾌히 따라 나서지도 않는 한마디로 '속을 알수없는 아이'였다고 엄마는 늘 ,, 지금까지도,, 그렇게 말하곤 한다.
학교에서 수학 여행이나 졸업여행가더라도 돌아올때까지 집에 전화 한번을 한적이 없어서 언제나 안절부절하며 기다리게 했던,,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그러려니 싶었다는 아이!

또 작은 다락방안에 기어들어가선 무슨 짓을 하는지 늘 그 다락방에 쳐박혀 있기가 일수였는데 아마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난 그 다락방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던것으로 기억한다.

그 다락방안에서 난 어쩌면 또래 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졌었던것 같다,지금생각해보면,, 그 당시 우리집에는 엄마 고향 친구분의 아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오빠는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에 다니고있었다.
늘 조용한 말씨와 서둘르지 않는 행동거지가 그 오빠를 괜찮았던 남자였다고 기억하는 전부지만 그 오빠를 통해 난 아주 다양한 책들을 제공받을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제공이라기 보다는 나의 일방적인 획득이였지만,, 어쨌든, 난 그 오빠의 방에 자유롭게 들어다닐수가 있었던 이유로 오빠의 책들을 몰래 꺼내다가 보고는 슬쩍 가져다 놓는 방법으로 참 많은 책들을 접할수 있었던것이다.
그 종류는 참 다양했다. 세계 문학 전집부터 해서 우리나라 고.현대 문학전,수필집, 단순한 소설,추리소설, 성인 소설 ,심지어 성인 잡지에 이르기까지...
그중에서 나의 가장 큰 흥미를 끌었던 것은 성인 소설이나 성인 잡지같은 것들이였다.
그것들을 읽을때면,, 이상하게 난 나의 아랫도리가 슬금슬금 꿈틀거리는 듯 했고 팬티속은 여지없이 젖어들곤했던 기억이 있다.
그 오빠가 어느 전문대에 합격이 되어서 자취방을 옮기기 까지 난 그런 책들고 잡지속에서 조금씩 "성"에 대해 눈을 떠가고 있었다.


사실 난 지나간것에 대해 미련도 크게 두지 않을뿐더러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현실에서 방황하고다닐만큼 별로 미련스러운 여자는 아닌데 어쩌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나의 기억력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그랬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이나 숫자 그런것들은 잘 잊지않는 편이였는데도,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했었는지 ,, 그런것은 잘 기억을 하질 못했다.
심지어 "그' 대한 나의 기억도 그렇다.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한번도 잊어본적 없이 늘 나의 꼬리표처럼 내 인생에서 떠나지 않는 그에 대한 것들도.그러면서도 난 그를 결코 잊지는 않는 것이다. 처음에 내가 의도했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말이다.

아이가 다시 곤한 잠에 빠져든다. 사랑스러운 아이다.
태어나서 부터 아니 이미 나의 몸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때부터 나를 힘들게 한적이 없는 아이, 보통의 아이들이 다 하는 그런 투정이나 고집도 이 아이에겐 늘 예외가 되었다.
그래서 난 늘 고맙기만 하다. 그리고 사랑할수밖에 없고...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낯선 이방인들로 가득찬 이나라에서 아이는 늘 씩씩하게만 자라갔다, 이제 5살이 되어가는 아이는 어느새 이 나라 사람들과도 웃으며 이야길 하고있다.
가끔은 또래 아이들과 하는 재밌는 이야기들을 내게 해주기도 하고..
오늘은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발표회가 있었고, 거기서 나의 아이는 춤을 추는 멋진 신사가 되어 얼마나 예쁘게 춤을 추었었는지..
그래서 지금 아이는 집에 돌아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는 잠에 빠져근것이다. 다섯살이란 나이는 아직 아이에겐 벅찼던 것이다.


남편이 집을 나서기전 틀어놓고 간 찬송곡이 집안 가득가득 성스러움으로 채우고 있는듯하다.
나의 남편은 신실한 기독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