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하는 잡채를 만들 때가 영신은 가장 기분좋다.
될수록 들어가는 모든 야채는 가늘게, 가늘게 채를 썰어야 폭폭 양념이 배어 맛있다고 늘 이야기하던 엄마의 생일. 당신을 위해서는 모든 야채 실가닥처럼 가늘게 썰어야 하는 수고가 드는 잡채를 한번도 만든 적 없는 엄마를 위해 영신은 될수록 가늘게 가늘게 칼질을 한다. 하지만 늘 당근이 힘들다. 결국엔 눈물을 뽑고야 마는 양파도 쉬운 일 아니지만 결이 딱딱한 당근은 고른 상태로 채를 만들기가 무척 힘이 든 야채다.
-장모님이 좋아하시는 잡채는 꼭 해 놔.
친정엄마의 식성을 기억하는 성국은 잡채에 들어간 당근은 실날같아도 급기야는 골라내고 먹는다. 하지만 영신은 안다. 오늘만큼은 불그러니 당근이 들어가야 더 맛갈스럽게 보이는 잡채에 들어간 그 당근을 성국은 아주 맛있게 먹어줄 것이다.
잔뜩 힘을 준 어깨를 쉬게 하느라 칼을 놓은 김에 영신은 고개를 빼서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4시 20분.
아침부터 추적거리는 비 때문에 젖었을 고속도로를 감안하면 성국은 아직 대전 조금 못 미친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에 도착할 시간도 대충 3시간은 벌어놓은 셈이다.
-햇빛은 잘 들어?
다세대 주택 반지하라는 소릴 듣고 엄마는 제일먼저 햇빛 넘나드는 걸 물었다. 반지하답게 꼭 절반만 햇빛이 들어 커튼도 절반어치만 달면 됐다는 내 답을 듣고 엄마는 전화너머로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는 분명 또 눈시울을 훔쳤을 것이다.
그 반지하 창을 열었다. 이 정도 비는 문제없다. 보름 쯤 전에 좀 세다싶은 비가 들이치자 성국이 창앞에 플라스틱 쟁반으로 비막이를 달아주었다. 옆에 줄을 두 개 달아 비가 안 올때는 위로 올려 놓아 엄마가 걱정하는 햇빛을 받으면 되고 비가 올 때는 줄을 당겨 쟁반을 밑으로 비스듬히 만들어 놓는다. 그럼 타닥타닥 밤송이 구워지는 소리를 내며 희한하게도 비를 되받아친다.
아침에 나가며 성국이 그 줄을 아래로 당겨놓았는지 창을 열어도 비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조금 어두운 듯해 영신은 모든 가구 중에 유일하게 온전히 돈 주고 산 키 큰 스탠드 램프를 켰다.
발그라니 불이 들어오면서 방 한칸짜리 조그만 영신과 성국의 보금자리가 연한 주홍빛 온기를 머금었다. 영신은 마른 걸레를 가져와 동네 아파트 단지에 다리 빠진 채 버려져 있던, 그래서 다리를 아예 다 빼버려 더 멋스럽게 만든 등나무 의자를 먼저 닦았다. 매일 매만지는 거라 얽힌 틈새, 먼지 하나 없어도, 그래도 영신은 걸레 한 귀퉁이를 조금맣게 말아 그 틈새로 비집어 넣는다.
처음 모습 그대로라면 그 빛이 오색으로 제법 찬란했을 커다란 자개상은 엄마가 소포로 보내준 린넨천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차라리 이 집에 잘 어울린다. 영신은 그 린넨을 벗겨 닦을 때마다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자개 껍질을 손에 줏어 모았다.
-아픈데 어떻게 웃어?
동해안 어느 한적한 바닷가. 역시 오붓하게 둘이 여행온 어느 남녀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한 사진속에서 성국은 영신의 뒤에서 정말 아프도록 그녀를 안았었다. 그리고서 웃으라고.
하지만 그 억지가 우스워 영신은 정말 웃고 말았었다. 사진 속 그대로 하얀 이를 다 내고 환하게, 환하게. 그 통에 성국도 같이 커다란 입 활짝 열고 또 환하게, 환하게.
사진 틀을 닦으며 영신은 또 그 웃음 비슷하게 웃어보려 했다. 하지만 막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냄새때문에 영신은 대신 화들짝 놀라야 했다.
"내 정신 좀 봐. 미역국, 미역국."
영신은 부엌으로 내달리려다 손에 든 액자를 잘 놓는다는 게 그만 삐딱하니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하필 카펫이 끝나는 자리에 그대로 떨어진 액자는 유리를 깨뜨려놓고 말았다. 영신은 울상이 되어 잠시 주춤하다 먼저 부엌으로 움직였다.
잡채 야채를 썰기 훨씬 전부터 올려놓았던 미역국은 바닥까지 다 졸아붙어 급히 들이붓는 물을 먹고 고약한 소리를 냈다. 다시 끓여야지 이대로 생신상에 올릴 수은 없는 일이었다. 불을 아예 끄고 거실로 나온 영신은 미역국은 이제 새카맣게 잊었다.
성국이 예쁘다며 직접 골라 온 액자였다. 두명의 아기천사가 양 밑 귀퉁에서 각각 한쪽씩 다른 눈을 감고 윙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천사가 들고 있던 아기별도 하나 떨어져 나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쭈그리고 앉아 깨진 유리를 걷어 내면서 영신은 문득 깨진 자국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깨져도 안 아프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유리가 박히는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영신은 그냥 웃기로 했다. 그러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성국이었다.
-도착했어요? 벌써?
-어, 어머님하고 차 탔어. 지금 출발하려고.
-우리 엄마, 또 한짐이지?
-어? 어....그러네.
-우리도 다 있다 그러지 왜.
-그랬지. 근데...
-알어. 우리엄마 고집 누가 꺾을라구.
-어....아니예요, 장모님. 잔소리 안했어요.
언제 도착할 것 같냐구요.
-피이. 이번에 오심 내가 확실히 못 박을거야.
-어, 나야.
-그래, 당신이야.
-한 두시간 반 정도 소요될 예정임.
-빗길에 운전 조심해요.
-걱정 마십시요, 사모님.
사랑합니다아.
-어머, 엄마 계시대며.
-어때? 나쁜 말인가 뭐. 그쵸, 어머님.
성국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