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순결이란게 목숨과 맞 바꿀 만큼 소중하다는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라지 않은 여자애들이 어디 있겠냐만,
엄마는 가정과 선생이었으므로 특히 내가 반듯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유난 하셨다.
그랬던 난데...
경훈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고, 또 아무것도 모르고 경훈을 챙기는
아빠까지 난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빠를 거역하기 위해, 난 망가지기로 작정 했다. 거기에 선택된
사람은, 미안 하지만 민규였다.
우린 수업이 먼저 끝나는 사람이 서로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곧장 그애의 아파트로 가서 어설픈 육체의 유희에, 젊음을
끝도 없이 혹사 시켜가고 있었다.
망가지는 건 당연히 여자의 몸.
임신이었다.
의사인 아빠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거짓말이 통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난 임신이 된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민규 아이예요. 우린 서로 사랑해요. 민규하고 결혼 하겠어요."
내가 살아오면서 그 때 처음 아빠의 눈물을 봤었다. 다른 아빠들
처럼,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아빠가 나를 때리셨으면, 내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 해졌을 텐데.....
"....아빠가, 너무 미사를 몰랐었구나.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생각은 말아라. 그대신 이 아빨 포기해라.넌, 더이상 내 딸이 아
니다. 니 할아버지가 너한테 쏟으셨던 사랑을 늘 생각하며 아일
키우거라."
'아빠!' 라고 소리내어 부를 수가 없었다.
엄마께선 방문을 잠그고 누우셔서, 단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내 방으로 올라가서 책들과 옷가지를 챙기고, 민규의 아파트로 갔다
민규는 그저 겁이난 표정으로 어정쩡하니 날 바라 보았고...
민규의 집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하셨다.
장사꾼 소리를 들으며, 돈의 위력 만을 믿고 살아온 집안에서, 의
사 집안과 사돈을 맺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출현은 대 환영이었
으며, 더욱 민규는 외아들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지금은 느의 부모님이 저러시지만,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으면 다 용서해 주실꺼다. 아무걱정 말고
아들이나 하나 낳아라. 학교는 계속 다니고 싶다고? 그래, 그래
아기는 내가 다 키워줄테니 느이들은 그저 공부만 해라."
민규 어머님의 푸근한 말씀에, 난 모든걸 다 맡기고, 친정에서의
섭섭함도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로 했다.
난, 어려서부터 그랬듯이, 당돌함과, 어려움을 모르고 컸으므로,
결혼이라는것이 어떤 의미의 새 생활인지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민규와의 결혼을 결정 했다.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키크고 마른 체형이어서,불러오는 배는
헐렁한 티셔츠로 얼마든지 감추고,겨울 방학을 맞이 했다.
철 없던 열 아홉의 여자아이를,
한 아기의 엄마로 받아들여줄 세상이, 내 앞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