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는 내 슬픔을 위로해 준다고 내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사실, 내 슬픔의 무게는, 할아버지의 사랑에 견주어 볼 때, 남들이
생각하는것 만큼 크진 않았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차츰 차츰 할아버지의 사랑에 짜증낼 때가 늘어
감을 느끼면서, 조금씩 노골적으로 할아버지께 드러내 놓고 투정을
부릴 때도 많았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주위에선 돌아가신 할아버지 걱정보담
오히려 내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특히, 민규의 나를 향한 위로는,나중에 두고 두고 생각해 봐도
언제나 따스한 훈훈함으로 남아 있다가,나중에는 싸한 바람으로
남아서 평생 내 가슴을 시리게 하는 또 한가지의 슬픔이 되었다.
"오늘 야자 시간에 나랑 나갈래?"
"나, 괜찮아.고만해. 내 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니얼굴이 더 우울
해 보이는거 너, 알아?"
"속으론 슬프면서, 강한척 하지마. 너네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귀여워 해주셨던가는 나두 너 만큼은 알아. 내 마음두 이렇게
슬픈데...."
"야! 내가, 너냐? 할아버지껜 죄송하지만, 나, 귀찮을 때두 엄청
많았어."
"무슨 여자애가, 그런말이 하구 싶어두 오늘은 참아야지..."
"됐어, 됐어. 야자 시간에 어디 가자구? 좋아, 가자."
민규는 나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아이다.
걸을걸이도 살금살금 여자처럼 걷고, 목소리도 나보다 훨씬 작고,
내가 제일 밥맛없어 하는, 그런 남자애들 중에 한 아이였다.
관심도 없고, 또 쳐다만 봐도 재수없어하던 아이였는데....
고 1 때,
학급 임원선거에서, 난 반장이 되었고, 경훈이는 회장이 되었다.
환경미화 심사 준비로 우린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고,그 아이
옆에는 늘 민규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내게 처음부터 관심을 보였던 아인 민규가 아닌, 경훈이 였다.
그 때 벌써 다 자라버린 경훈인 180 Cm 가 넘는 키에, 얼굴엔
여드름이 무성했지만,쌍가풀이 커다랗게 진 눈으로 눈웃음까지
치니, 우리반 여자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와 짝을 못해서 안달이었
다. 그런 경훈의 관심은 오직 나 하나였다.
나도 물론 그 아이의 그런 마음이 싫은건 아니였다.
그렇지만, 난 반장이었고, 또 다른 임원들도 같이 남아 있었으므로
경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늘 민규에게 말을 했고, 장난을
쳤었다. 그럴 때 마다 경훈이 벌개지는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깔깔거렸다.
환경미화 심사가 끝났다. 당연히 우리반이 1 등을 하였고, 담임
선생님께서 임원모두에게 수고 했다면서 짜장면을 사 주셨다.
첫번째 사건이 터졌다.
정신없이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여자애건 남자애건 모두 한그릇
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남자애들 성화에 분식집으로 또 가야
했다.여자애들은 콜라만 먹었고, 남자애들은 떡볶이를 한참들 먹고
있을 때, 내 몸 여기저기가 부풀기 시작했다.두드러기가 났던거다.
"선생님, 저 먼저 집에 갈래요. 이상해요."
"허, 이 녀석! 두드러기로구만,느이들 천천히 먹구가라. 선생님은
미사 데려다 줘야겠다."
그 때,나선 아이가 있었다. 경훈이였다.
"선생님, 제가 데려다 주겠습니다. 미사네 집을 제가 알거든요."
"그럴래? 니가 확실히 집을 안단 말이지? 그래, 얼른 택시 타고
가거라."
그 순간에 왜 우리반 여자아이들 얼굴이 떠 올랐는지....
"선생님, 저 애랑 같이 안갈래요. 그냥 혼자 가두 되는데...
민규야, 니가 나 좀 데려다 줄래?"
경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걸 보면서, 속으로 나도 후회 했었다.
'에휴, 그냥 냅둘껄. 소문좀 나면 어때서...잘난척은...'
그러면서도 선생님께만 인사를하고 경훈이 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분식집을 나섰고, 그 가운데서 민규만 쩔쩔매고 있었다.
"야! 뭐하니? 빨랑 안 나오구?"
"저기, 미사야. 경훈이랑 가라. 경훈이가 데려다 준다는데 왜
나한테 가자구 그러니?"
"얘는, 나 지금 많이 괴롭단 말야.빨랑 가!"
"그래두 경훈이가...그럼 셋이 같이 갈래?"
"야! 지금 놀러가니? 관둬! 나 혼자 갈꺼야."
휑하니 돌아서서 택시를 잡고 있었다. 택시문을 열고 타려 할 때
따라 탔던건 민규가 아니고 경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