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열 여덟].....세희의 아픔
세희는 꽃을 샀다. 소국에게서 가을 향기가 가득했다. 꽃집에 들어
설 때 몹시 좋아하던 정민이를 생각하며, 투명하고 커다란 화병에 꼽
아 놓고 가슴 따뜻함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감성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행복]이라는 감성을 찾아 끌어내기로 했다. 이제는 불행 중
다행을 생각키로 했다. 얼마 전 까지 절망의 절벽까지 내몰렸었던
세희였다. 이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아프면 아프다 소리치고, 힘들면 힘들다고 내색하고, 외로우면
의지하고, 괴로우면 멍울을 토해내고, 답답하면 일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저녁 남편의 어떠한 구실에 휘말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구타
를 당할지 몰라도 일단 이 순간은 마음의 행복을 마음껏 느끼기로 했
다.
세희는 남편을 미워하면서, 한편 가엽게 생각하며 살아 왔다. 시어
머니가 없는 집에 시집 온 세희가 결혼해서 남편에게 어머님의 기일을
물었을 때 남편의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았었다. 세희가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던 시어머니는 남편이 어렸을 때 가출했다는 말을 하며 얼
굴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남편의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은 세희에 대한 집착과 도망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남편의 구타와 폭력은 음주 후에 오는 속 쓰림처럼 습관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세희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다음날 아침이면 친
정 식구들까지 포함해서 협박 또한 잊지 않았었다.
세희의 아파트 이웃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 나는 1107호의 가정
불화를 알지 못했다. 남편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의 인정받는 직
업을 가진 사람이다. 대외적으로 조그마한 오점이나 흠을 남길 사람
이 아니다. 오죽하면 아이들조차 엄마가 맞는걸 알지 못했었다.
처음 세희가 남편에게 맞은 날. 세희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해
실뇨를 할 정도였다. 곱게 곱게 자라 남들이 잘 하는 거라고 말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술에 취해 폭군으로
변했고 세희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마음과 몸에 상처를 남겨야 했
다.
술에 취해 11시쯤 귀가한 남편에게 꿀물을 들고 다가갔었다. 일이
많았나 보다. 술자리가 있었나 보다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세희에게 단지 무관심하다는 이유가 그날의 세희를 지옥으
로 몰은 이유였다.
남편이 꿀물을 받아들더니 마시지 않은 채 식탁 위에 갖다 놓고 세
희의 손을 잡아 안방으로 끌고 갔다. 옷을 갈아입거나 섹스를 위한
행동으로 생각했던 세희에게 남편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청태이프가 언제부터 침대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 있었는지 세희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준비되어 있던 청태이프로 세
희의 입을 막고 머리를 움켜잡더니 한쪽 벽면이 엘리베이터 옆에 붙
어 있는 작은 방으로 끌고 가 집어던지듯이 내동댕이쳤다.
세희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
었다. 입에 붙은 테이프를 때려는 순간 남편의 발이 세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입안에서 메아리치는 신음을 내 뱉으며 꼬꾸라졌었다. 그
렇게 남편은 발길질을 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입에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날밤 둘린 소리라고는 세희가 남편의 주먹과 발길질
에 체이고 얻어맞는 둔탁한 소리만 들릴뿐이였다.
세희가 눈을 떳을 때는 어둠뿐이었다. 세희는 꿈을 꾼 줄 알았었다.
몸에 불편함을 느껴 일어나려 할 때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에 여전
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입에 붙어 있는 테
이프를 확인하고 눈물이 쏟아졌었다. 세희의 몸이 축축함에 젖어 있
었다. [무슨 물일까?] 생각하는데 지린내가 났다. 세상에 자신에게 이
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온 몸이 가위
에 눌려 움직여지지 않는 꿈속 같이 마음먹은 대로 대지 않았다. 간
신히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 내고 울다 다시 기절을 했었다. 두 번
째 눈을 떳을 때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주변이 환했는데 몇시쯤이였
을까? 남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섭고 두려웠다. 눈물이 또 쏟아졌다.
"미안해."
"왜? 왜 내게 그랬죠?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레?"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미안
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
죠?"
"내가 일하는 아줌마를 불렀어. 지금 아침을 만들고 있을 거야. 약
을 사왔으니 식사하고 먹도록 해."
"이런 경우를 두고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요? 당신이라는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였나요? 정말 무섭군요."
세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놓았다. 몸의 통증은 둘째이고 너무
나 기가 막히고, 무서워 혼란스럽기만 했었다. 그러나 세희의 짧은 비
난에 남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처가에는 알리지 말아 주었으면 해."
"......"
방문을 향해 걸어 나가다 등을 돌린 채 차가운 말들을 뱉어 놓았
다.
"아무리 어른이고 부모라 해도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지적 당하
고 질타를 당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충분히 반성하
고 있으니 사과를 받아 주었으면 해. 미안해"
어떻게 어제 일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된다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질타 당함은 있을 수 없
다니 그리고 사과를 받아들이라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
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 출근이 늦어서 이만 나갈게. 쉬도록 해."
세희의 망가진 몸과 마음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남편의 반성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반성을 할 생각조차 안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구타가 습관이 되듯이 남편의 사과 아닌 사과도
습관이 되어 갔다.
어느 날 세희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남편은 단 한마디로 자신에게
이혼은 없다고 거절했고. 만약 가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처갓집 모두
가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아 두었다. 세희는 남편의 위치가 충
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희는 소국이 곱게 담긴 꽃병으로 시선을 옮기며 긴 회상에서 벗
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