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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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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상실 2000-10-10

정기적인 가출이라...

시어머니와 시누이까지 모시고 사는 주부의 정기적인 가출이

라...

하아...드디어 그녀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인가.

그 후 J는 그녀의 가출을 일탈이라고 보고 싶다 말했다. 가출보

다는 일탈이 우리 나이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가출이나 일탈이

뭐가 다르냐고 묻는 내 말에 그녀는 뜻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들

었을 때 느낌이 다르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가출은 돌아올 기약이 없는 떠남이고, 일탈은 돌아오기 위한 떠

남이 아닐까...

일탈......한때 나 역시도 새털처럼 가벼운 일탈을 꿈꾸곤 했

다. 하지만 일탈을 꿈꾸었던 때는 적어도 내게 작은 애정이라도

있을 때였다. 잠시 이 곳을 벗어나 정체성을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하지만 왜 나는 L의 소식을 전해듣고 그것은 가출도 일탈도 아니

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그 동안 전화로 전해 받은 그녀의 무기력한 일상과 행복해

보이기 위해 늘어놓던 거짓말들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일탈이라

면 돌아와서 달라지는 무엇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전화로 느껴지는 그녀는 늘 변함이 없었다.

돌아올 작정을 하고 나가는 가출도 아니고, 돌아와서 변함없는

일탈도 아니라면 난 그녀의 행동을 잠수라 말하고 싶었다.

L과의 전화는 1년이 넘게 이어졌다. 물론 그 동안 한번도 얼굴

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나도 한번 만나자는 제안을 서로에

게 하지 않았고 그녀의 전화 역시 날 궁금해하는 내용은 아니었

다.

그녀의 잠수 때문인지 가끔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매달 마지막 금

요일에 나가서 일요일에 돌아온다는 그녀가 도대체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정말 궁금했다.

L은 돌아오고 나면 가끔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나 일상적인 것이어서 난 J의 말이 사실인가 의심스럽기도 했었

다.


L과 첫 통화를 한 것이 벌써 일년이 지났다.

우리는 망년회 겸 신년회를 하자고 바람잡는 K의 성화에 못 이

겨 학교 근처 갈비집에서 몇 년만에 만남을 가졌다. 물론 L은 나

오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P선배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있는 듯

없는 듯 여전한 그였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웃기도 잘하고 술

도 권하는 모습이었다.

-L이랑 전화통화 자주 하니?

P의 눈이 약간 젖어 있었다.

-가끔 전화 와요, 형은 요즘 어때요? 왜 결혼 안하고 아직 혼자

살아요?

-그러게 말이다. 괜찮은 여자 있으면 소개시켜줄래?

그의 표정이 너무 애잔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많이 취했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얘기 중이었는데 아무

도 우리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취기와 객기였을까.....나

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다.

-형, L이 저렇게 사는 게 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묻고 나서도 기가 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

도 객기라는 걸 부릴 줄 알았나...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이었

다.

놀라운 건 선배의 태도였다.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신파야...게다가 내

앞에서...나는 허둥지둥 선배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형, 왜 이래요, 취했어요?

-아냐, 아냐, 안 취했어. 안 취했다구...내가 불쌍해 보이니? 아

냐, 난 아무 것도 아니지, L도 살고 있는데...

단순히 술자리를 합석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이건 너무 심

한 자책 아닌가.

-형, 형 잘못 아니잖아. 그게 왜 형 잘못이야, 어쩔 수 없는 거

잖아. 이러지 마요 제발.

-아냐...내가 그 때 L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난 자신이 없었

어...난 걔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구...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았는데...근데 말야...근데 말이다...이제 생각하니

까 차라리 내가 자신이 없더라도 그 때 L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

어...

이건 다 무슨 말인지...단순히 자신의 친구를 만나게 해서 그녀

가 불행해 졌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L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그 놈 때문이 아

냐...그 놈과 있었던 일들은 다 상관 없었다구...하지만...내가

어떻게 L과 결혼할 수가 있어...난 그럴 그릇이 못되잖아...너

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도 그 놈은 고시에 패스할 줄 알았

다...그거 하나 믿고 보낸 거야...그렇게 그렇게 형편없는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청혼이 L의 마지

막 구조요청이었는데...나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절하게 도

움을 바란 거였는데...

그녀가 청혼을 했다니...농담으로라도 이런 얘기를 할 선배가 아

니었다.

L은 자신의 과거를 모두 감싸줄 사람이 선배밖에 없을 거란 생각

을 했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지금의 남편이 찾아와 모든 것을 폭

로해도 자신을 감싸줄 유일한 남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 역

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리라...선배라면 자신 인생에 완벽

한 동반자는 아니더라도 든든한 보호막은 되었을 테니까...당연

히 좋아라 받아들일 줄 알았던 선배가 도망쳐버리자 그녀 역시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도 그 때는 스물 세

살 이었다.

그 나이라면 아무리 독하고 뻔뻔한 여자라 해도 혼자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L도 선배도 어린 나이에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그런 거래를

생각한 L의 태도는 아무리 극한 상황이었다지만 이해할 수 없었

다. 물론 그녀가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까지 들춰가며 청혼했다는 것은 거래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 때 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