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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상실 2000-10-08

-세상에...이게 몇 년만이야. 여기 번호는 어떻게 알고...

-P선배가 알려줬어. 몇 일 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니 전

화 번호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적었지. 잘 지내니?

솔직히 근래에 이런 반가운 전화는 드물었다.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고는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말에 남편도 없는 썰렁한

거실 소파에 누워, 들려오는 그녀의 미성에 젖어 잠시 행복감을

느꼈다.

-하아...정말 반갑다. 나야 늘 그렇지 뭐,

-사실 니 소식 늘 듣고 있었어. 결혼하고 나니까 니가 제일 궁금

하더라.

-연락하지 그랬어. 나야 원래 용건만 간단히 아니냐. 보고 싶은

사람이 전화해야지.

오랜만에 그녀와 웃었다. 이렇게 농담을 하고 웃는 일도 얼마 만

인가.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신랑은 교수라고 들었어, 행복하겠다.

-교수는 무슨, 보따리 장사야. 불쌍하지뭐, 저러구 사는 거 불쌍

해서 대출받아서 학교 하나 세울 생각하고 있다 야.

그 날 따라 농담이 거침없이 나왔다.

-하하...여전해...넌 집에서 학생들 가르친다며? 수험생들이야?

-음...그냥 고등학생들 논술이나 봐주고...선배들이 이렇게 사

는 거 불쌍한지 가끔 번역일도 주고 원고도 맡기고 그런다.

-그래도 넌 사람들이 연락 자주 하는가 보네...난 너 결혼하면

연락 끊고 살 줄 알았어...처녀 때 니가 워낙 사람들 귀찮게 생

각했잖아.

-하하..결혼하고 철 든 다는 소리도 있잖아.

-철은 무슨...학생 때 너 만큼 철 든 애가 어딨다구...

늘 사람에게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

녀였다.

-행복해? 쌍둥이들은 학교 다니고?

잠시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는 듯 했다.

-그냥 내 기준에서는 행복해. 너가 보면 아닐 지도 모르지만 말

야.

-무슨 말이 그래, 자기 기준에서 행복하면 된 거지. 우리가 언

제 남의 눈 의식했다고 그래. 특히 너 말야, 추레한 숲 속의 공

주.

추레한 숲 속의 공주...학교 다닐 때 우리가 붙여준 그녀의 별명

이었다. 그녀의 집 정원의 빽빽한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 들을

보면서 너무나 대비되는 그녀의 옷차림에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

녀는 깔깔거리며 오래도록 웃었다.

-예전에 엄마가 그 별명 듣고 뭐라 셨는지 아니? 당장 옷 사러

가자는 거야. 그러길래 엄마가 옷 좀 제대로 차려 입고 다니라

고 몇 번이나 말했냐며 잔소리 잔소리, 등짝은 얼마나 때리던

지...너희들이 자기 딸 흉보는 줄 알았나봐.

-아이고...너 그거 칭찬으로 들었나 보네. 지금에야 하는 얘기지

만 니가 제일 추레했어 야,

하하하하......오랜만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웃어보는

건....

-우리 쌍둥이들 내년에 학교 들어가. 학부형이 된다니까 너무 감

사한 거 있지? 우리 애들 아무 탈없이 저렇게 커줬구나 싶고 말

야.

-그래, 힘들게 얻은 아이들이니까 더 할꺼야.

-너도 들었구나?

-그래, 사실 나도 시술을 받아볼까 생각중인데 남편이 싫어하네.

-너희 부부 둘 다 건강한 거지?

-그렇데...병원에서 결과는 그렇게 나왔는데 뭐 모르는 일이지,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병원에서는 시술받아 보라고 하는

데 주변에서 너무 힘든 사람들을 많이 봐서...대여섯 번 해도 실

패하더라구...

-그래...사실 그것도 운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그때 고생 생

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때가 많아...그래도 맘먹고 하면 다 견딜

수 있을 꺼야.

-참, 너 어디 사니? 시어머니 모시고 사니?

-응, 나 대전서 살아... 시어머니에 시누이...대가족이지 뭐. 나

야 사람 많은거 원래 좋아하잖아. 시어머니도 잘해 주시고, 시누

이도 아이들 잘 보살펴 주고, 힘든 거 없어.

갑자기 그녀 남편이 생각났다. L도 알고 있을까. 남편이 술만 먹

으면 그런 소리를 떠들고 다닌다는 것을? 만약 그녀에게 알려주

면 자기 남편을 술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아니면 또 상처는 자

기만 받은 채 넘어가려 할까...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봐도

그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뜻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신랑은 뭐해? 고시공부 중단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중단시켰어. 너무 오래하면 아무래도 중독되겠다 싶더라

구...지금은 그 사람 선배들이랑 정보통신 사업하고 있어. 잘 되

나봐. 워낙 착실한 사람이야. 어렵게 자란 사람들이 그렇잖아.

자기 식구 끔찍하게 위하고, 사회생활도 잘 하고 말야. 사업하니

까 사실 집에는 자주 못 들어와...벤처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잖

아. 그래도 전화는 자주 하고, 집에 오는 날은 나 좋아하는 오렌

지도 잔뜩 사들고 온다 야.

J의 말보다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사실이야 아무러면 어떤

가. 속고 살아서 행복하다 면이야 알고 괴로운 것보다는 나은

게 아닐까? 적어도 난 그렇게 사니까...

-행복하게 산다니까 기분 좋다. 이제 전화도 자주 하고 그래. 전

화번호 알려줘. 나도 전화할게.

-아냐. 내가 할게. 시외전화비 많이 나와. 내가 자주 걸게. 아

이 문제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맘 편히 생각해. 넌 착하게

사니까 분명히 예쁜 아이 주실 꺼야.

한동안 그녀의 전화를 자주 받았다. 늘 행복하다는 말을 했지만

점점 그녀의 삶이 그녀의 말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가끔 허둥지둥 전화를 끊는 그녀의 태도도 불안했다.

살림을 도와준다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살림만 하는 듯 했다.

사실 시댁 식구들이 그녀의 장점들을 봐줄리 없었다. 사실 며느

리의 실력을 제대로 인정해 주는 시어머니가 얼마나 많을 것이

며, 그 실력을 발휘하고 살아도 좋은 눈으로 봐주는 시어머니들

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돈을 벌어다 주면 그때뿐이고, 손주

들과의 전쟁, 끝나지 않는 자신의 살림치레에 진저리도 날 수 있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행복하다고 했다.

난 나의 감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에 대한 내 예감

은 틀림없었다. 행복한 생활이 절대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믿어버리고 나니 그녀의 전화는 지루한 일상이 되

어 버렸다. 그녀는 무능력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저렇게 생활을

숨기면서 까지 나에게 전화를 해서 행복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

는 눈물겨운 노력이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행복하다

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적어도 자신보다는 더 힘들게 사는 친구

와 통화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보상심리라면 말이다.


-L이 정기적으로 가출한다는 얘기 못 들었지?

J의 목소리는 활기에 넘쳤다. 평생을 혼자 하는 L과의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할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