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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상실 2000-10-08

-그 사람이랑 살 자신 있다고...

내 질문을 유도하려는 건지...아니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다

고 생각하는지...L은 반복해서 말했다.

내 질문을 유도한다고 해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에 대해서

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이미 그녀의 결혼은 정해진 것 아닌가.

정해진 마당에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들 걱정하는 거 알아...하지만 환경이 중요하다고는 생각 안

해..그리고 그 정도 환경은 내가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꺼야...

난 그런 건 자신 있어...오늘 널 만나자고 한 건...선배 소개

시켜주려고 했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 얘기하거나 자리를 뜨는 것은 더

우스웠다.

잠시 후 그가 왔지만 결국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남자의 태

도가 너무 불손했기도 했지만 L이 뭔지 모르게 주눅들어 있는 모

습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결혼식은 화려하게 치러졌다.

식장에서 들은 바로는 모든 예식 비용과 여행 경비도 L쪽에서 부

담한다고 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관심은 L보다 J에게 집중되었

다.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 듯 호들갑을 떨었다.

J의 말에 의하면 기울어도 너무 기우는 결혼이었지만 그녀의 말

이란 신뢰하기가 어려워 누구도 쉽게 맞장구를 치지는 않았다.

남자의 집안은 홀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5남매를 키운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고생과 멸시를 겪었으며 누나들은 오빠와

남동생의 대학등록금을 번갈아 대며 이제나 저제나 남동생의 고

시합격만을 바라보고 산다고 했다. 오빠는 대기업에 취직해 결혼

을 했지만 며느리 잘못인지 아들을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

하는 시어머니 잘못인지 아예 담을 쌓고 살고 있으며 이제는 L에

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다고, 그래서 L의 결혼 생활은 거의 절망

적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호들갑이었다.

게다가 큰누나는 이혼하고 집에 들어와 살고 있으며, 다른 누이

들도 사는 게 그만그만해서 L의 집에 경제적인 도움까지 은근히

바라는 눈치라고 했다.

J의 말을 들으면서 그날 그 남자의 불손한 태도가 더욱 이해가

안됐다. 더군다나 L의 그 주눅든 태도는...


L은 그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몇 년간 소식을 끊었다. J의 전화

로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도 다는 믿을 것이

못되는 얘기들이라 모두 흘려듣던 터였다. 단지 임신을 했다든

지 난산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든지, 남편이 고시를 포기했다는

얘기들은 다른 동문들을 통해서도 듣게되었다. 남동생의 고시합

격을 고대하던 누이들이 어떻게 변했으며, 장차 검사 아들 검사

아들 하던 그 시어머니는 어떻게 변했을까 가끔 궁금하긴 했으

나 이제 L은 결혼식과 함께 내 관심 밖의 일이 되어갔다.


나는 결혼한지 4년이 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아

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점을 봤더니 자기 아들 사

주에 아이가 없다고 하더란다. 늙어서 외로우니 입양하는 것이

어떠냐고 자꾸 의중을 떠보시지만 나야 점을 믿지도 않을 뿐 더

러, 더군다나 남편이 입양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이가 싫다는 것

이다. 나날이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와 입양을 거부하는 남편에

게 염증이 생겨갔다.


J는 한동안 나와 가깝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문턱이 닳도록 들락

거렸으나 신랑이 자신에게 별 관심을 보여주지 않자 샐쭉해졌는

지 전화 통화만 하는 터였다.

어느 날, J는 또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L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

다.

-난 첨에 걔가 그런 집으로 시집을 가길 래, 정말 특별하게 사

는 거 너무 밝힌다 싶었거든. 왜 있잖아 그런 애들, 특별하게 보

이고 싶어하는 애들 말야. 난 늘 L이 그래 보였거든. 그렇게 잘

살면서 매일 추레하게 옷 입고 다니고 말야, 화장도 안하고, 남

자가 좋다고 해도 싫은 척 말야, 남들은 내가 L을 질투한다지만

솔직히 내가 걔를 질투할 게 뭐 있어? 걔가 나보다 똑똑하긴 했

지만 결국 똑똑해서 그 덕 보고 사니?

-용건만 말해.

-어머 나 좀 봐...또 삼천포다. 우리 신랑이 L남편이랑 친분이

좀 있잖니.

같은 고시원에서 공부한 것도 친분이라면 친분일 수 있었다.

-우리 신랑이 얼마 전에 친구한테 들었는데 세상에 L이 학교 다

닐 때 수술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산부인과 의사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단다 야. 지금 쌍둥이 낳은 것도 시험관 아기 한거잖아.

걔 너무 깜찍한 애 아니냐? 세상에 고고한 척 혼자 다 하더니 그

러니 그 남자랑 결혼 안 할 재간이 있었겠냐구. 그 남자가 꼭지

가 획 돌아서 다 불고 다녔을꺼 아냐. 게다가 그 미친놈이 지 마

누라 얘기를 술만 먹으면 꺼낸다는 거야. 자기가 처음에 꼬셔서

눕힌 얘기며, 수술한 얘기 같은 거 말야. 우리 신랑 말이 고시공

부할 때는 술도 안 먹고 굉장히 착실한 사람이었는데 몇 번 떨어

지고 포기하더니 사람이 망가졌다지만 야, 착실한 놈이 자기 여

자를 몇 번이나 수술시키냐? 게다가 L도 그래, 똑똑한 애가 피임

도 모르냐구. 남자 사귀면 건 기본아냐?

또 삼천포다...더 듣기가 싫었다. J가 전화를 끊을 때는 자존심

이 상할 때였다. 하지만 L의 얘기를 하느라 내가 무슨 말을 해

도 들릴 리 없었다.

-그 놈 결국 지금 뭐하는 줄 아냐? 벤처인지 뭔지 한다고 처가에

서 돈 잔뜩 끌어다가 말아먹고 있단다. 기가 막혀서...

여자는 보통 결혼해서 한 번 성숙하고, 아이 낳고 한 번 더 성숙

한다고 하던데 J는 전혀 기미가 안보였다. J에게 L의 얘기를 들

을 때마다 L의 기막힌 상황보다 J의 거침없는 말이 더 기가 막

혔다. 예전에 엄마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딸 키우는 집은 열 화

냥년 욕할 거 없다고, 자기 집 딸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

다는 말이었다.

불쌍한 건 L이었다. 그렇게 사는 게 불쌍한 것이 아니라 결혼전

일까지도 이렇게 낱낱이 남들 앞에서 까발려 지고, 남들 입에 이

런 식으로 올려 진다는 거였다. 이건 스포츠 신문의 가십거리 연

애기사 보다 더 좋은 안주거리였다.

-야, 니 딸이나 잘 키워. 피임도 확실히 가르치고 남자 고르는

법도 가르치고...

J 딸은 이제 3살이다.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몰상식하게 하냐?

한동안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L은 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크리스마스를 몇 일 앞둔 저녁이었다. 얼핏 잠들었는지 전화벨

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는 왠지 누군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L이었다. 그 듣기 좋은 미성은 여전했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그 쪽의 분위기는 목소리의 톤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침울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