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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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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상실 2000-10-04

전화가 왔다.

L이 또다시 잠수했다는 전화였다.

달력을 보았다. 어김없이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다.

J는 L의 잠수를 일탈로 표현하곤 했지만 일탈이라고 보기에는 너

무나 정기적인 행동이었다.

일탈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그렇다면 L의 가출은 명백한 잠수다.



늘 그렇듯 전화선을 타고 흘러오는 그녀는 무기력하다.

자신의 무능력과 자격지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장난 충전기다.

가족 모두를 충전시키기 위해 하루하루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하

고는 이제 더 이상 애프터서비스도 받을 수 없도록 망가진, 그래

서 뜬금 없이 전화해 가족 자랑을 하염없이 늘어놓아도 애잔한

마음에 들어줄 수밖에 없는 고장난 충전기다.

그녀의 과거를 함께 했던 우리는 그녀의 충만했던 에너지가 저렇

게 밑바닥을 드러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의 학창시절은 충만한 에너지 덕분에 덩달아 활기 있는 일

과 사랑으로 둘러싸였고, 우리는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그녀의

에너지를 한때는 부담스럽게 한때는 유용하게 충전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물려받은 유산이야말로 정말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한량의 안사람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이 구석 저 구석 음지에

서 자라고 있는 남편의 씨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겠지

만 그녀의 딸만큼은 강하고 독하게 키워냈다.

L은 부잣집 딸이 주는 보편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런 이미지를 싫어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를 부잣집 외동딸로 보이게 했던 것은 우유같이 희고

통통한 얼굴, 팔꿈치며 무릎조차도 굳은살이나 상처 없이 희고

깨끗한, 색깔뿐이었다.

그녀는 늘 티셔츠에 청바지, 같은 점퍼, 4년 내내 같은 배낭이었

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곳에서도 빛이 났다.

그녀의 황홀한 언변 때문이기도 했고,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 때

문이기도 했다.

학회세미나에서 그녀의 지식과 화술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팔방미인이란 말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비상한 기억력과 암기력, 타고난 미성,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화

술과 모험심,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끈기와 불굴의 정신 등, 학창

시절 그녀를 떠올릴 때면 그녀가 갖고 있던 그 재산들이 끝도 없

이 생각난다.

우리는 도대체 그녀가 어떤 거목으로 성장할지 궁금해 미칠 지경

이었다. 우리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시간이 빨리 흘러 그

녀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파멸이나 불우한 미래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

다. 그녀의 재주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기에는 우리의 궁금증은 사뭇 진지하

고 순수한 것이었다.

도대체 저 에너지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다만 그것이 궁금했

을 뿐이다.


우리의 순수하고 진지했던 궁금증에 일격을 가했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