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남자의 결혼식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다 오르자 바로 앞에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나은이의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손 끝에 진득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 힘들어 했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망설였었는지... 새삼 가슴이 떨려 왔다.
하지만 이제 물러 설 수가 없었다.
걸음을 떼기 전에 나은이를 다시 바라다 봤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코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나은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활짝 웃어 보었다.
어제부터 오랜 기차여행에 지쳤는데다가 처음 하는 서울 나들이
에 흥분한 나은이가 괜찮은지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이 이상은 없
어 보였다.
"엄마, 아직 멀었어?"
"응, 저기 보이지? 저기야."
"와,궁전같애..엄마, 저기 가면 진짜 이쁜 드레스 입은 언니도
보고 결혼하는 것도 보는 거야?"
"그래.."
딸의 손을 꼭 쥔 채 결혼식장을 향해서 걸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그의 이름이 적힌 결혼식 안내표지가
보였다.
대단한 집안답게 호텔에서 성대히 치러지는 그의 결혼식...
난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이 휘둥
그레져서 여기저기 둘러보기 바쁜 나은이를 생각하니 가슴 저 밑
바닥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이러면 안돼..넌 이러면 안돼.
주문을 외우 듯 이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엘레베이터를
탔다.
예식이 올려질 홀 앞에 그가 그의 부모와 나란히 선 채로 사람들
에게 축하를 받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그를 향해 걸으려 할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하고
가볍게 치는 사람이 있었다.
윤형 선배였다.
"어, 이게 누구야? 영인이 아냐?"
"어, 오랜 만 이예요. 잘 지내셨어요?"
"그대로네..영인이는..이 애가 딸이야?"
"네...나은아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그래, 나은이 참 이쁘구나.."
선배의 눈에 묻어나는 안스러움을 나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누군가 내 딸을 그런 안스러운 눈길로 바라 보는 것조차 내게는
그 애를 향한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져 가슴 아팠다.
"그래, 어떻게 지내니.."
그 안스러움이 다시 고스란히 나를 향했다.
"잘 지내요."
"다행이구나. 서울엔 언제 왔니?"
"네, 며칠 전 에요. 이모 댁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소식을 들었
지요. 저도 축하하고 싶어서요."
대답을 하면서 나은이를 슬쩍 넘겨다 보았다.
딸애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게 마음 쓰였지만 다행이 나은이
는 많은 사람들과 휘황찬란한 실내를 구경하느라 반 쯤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 잘 왔다. 가서 인사 나눠라.그리고 애들 다 온댔는데
너 보면 아주 반가와들 하겠다. 나두 반갑다 진짜."
"네.."
나는 선배를 향해 조금 웃어 보였다.
"축하해요."
그는 흔들리는 눈빛이 되었다.
나도 흔들렸지만 몇 백 번, 아니 몇 천 번 연습하고 오지 않았던
가.
"어떻게..."
"서울에 왔다가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그리고 나은아, 아저
씨께 인사드려야지."
"딸이야,,,이 애가?"
"응, 이쁘지! 아빠를 많이 닮았어..."
"이쁘구나, 나은이 반갑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라..."
"네에.."
무엇이 부끄러운지 나은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내
뒤로 숨어 버렸다.
"다시 한 번 축하해요.그리고 행복하세요.."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렸지만 곧 바쁘게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묻혀버렸다.
옆에서 당황해 하면서도 못 마땅한 얼굴로 바라다 보고 있는 그
의 어머니에게 난 가볍게 웃으며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불청객임에 틀림없지만 아주 통쾌한 기분이었다.
당신들한테 관심 있어 온 게 아니야...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신부를 보러 갔다.
이제 이게 마지막 순서였다,
그의 신부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나은이는 드레스를 입은 예쁜 신부를 보기 원했다.
6살 여자아이한테 그건 동화속의 공주를 보는 것 같은 신비함이
기도 했다.
풍요속에서 잘 자란 여자답게 그녀는 아름답고 빛났다.
신부대기실 앞에서 그녀를 바라다 보면서 나는 나은이에게
말했다.
"예쁘지?"
"응,,공주같아"
나은이는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 모녀는 그녀의 눈
에 띄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았대도,시댁쪽 친척 중 하나이거니
할꺼라고 생각했다.
"나은아 이제 갈까?"
"맛있는 거 먹으러?"
"응. 아이스크림 사 줄게."
"결혼식은 언제 하는데?"
"나은아, 결혼식 다 끝날 때 까지 있으면 아이스크림 먹을
시간이 없어..."
"왜?"
"기차 타러 가야 하니까,시간이 다 되었단다."
"나 결혼식 볼래..."
"엄마가 신애 언니 결혼식 할 땐 꼭 다 보여줄께....약속.
그 대신 아이스크림 많이 사줄께."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지만, 아이스크림의 유혹에서 아직 자유로
울 수 없는 나이였다.
"아니 왜, 가려구? 식이 시작도 안했는데?"
식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누르는 데 윤형 선배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기차 시간이 다 돼서요. 저 이래 뵈두 사장이잖아요.."
"아쉽네..."
"언제 한 번 놀러 오세요.."
"그래, 그럼 잘 가!"
"나은이도 안녕!"
"아저씨 안녕!"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일시에 긴장이 풀리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은이의 옆 얼굴을 바라다 봤다.
-아빠를 닮았다구?
잠시 전 그에게 했던 내 말이 생각났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왜 웃어?"
"응,나은이가 이뻐서.."
돌아 오는 기차 안에서 나은이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잠이
들었다.
잠든 나은이의 얼굴을 보며 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은아, 아빠 얼굴 잘 봐뒀어?
이 다음에,엄마더러 왜 그?O냐고 탓하지 말아..
엄마도 어쩔 수 없었단다.
한 번은 어쩌면 딱 한 번 뿐이겠지만, 그래도 아빠 얼굴
봐야 하잖아....
창 밖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한 없이 잠든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나를 용서하라고 빌고 또 빌었다.
잠든 딸애의 숨결에서 고단한 단내가 풍겨왔다.
어둠이 내린 밖을 바라다 보는 척 했지만,내 안에 어쩔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