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옥이의 생일날 주경이가 하얀색 강아지 인형을 사가지고 왔다.
조그만 카드도 있는거 같았다.
주경이는 참 섬세하고, 착하구나. 여자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도
잘알고 칭찬한마디 해줘야겠다.
" 야, 다큰 여자한테 인형이 뭐냐?, 선옥이 정신연령이 어리냐?"
또 일행을 썰렁하게 해버린 나. 그치만 둘이서만 너무 가까워
지는건 왠지 기분이 안좋아.
성태와 난 아직 그대론데....
애들을 바래다주러 고대앞을 지났다. 항상 내가 가겠다고 찜해논
학교였다. 앞서서 걷던 애들이 노랠 부르며 간다.
` J 스치는바람에, J 그대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쓸쓸히 그댈
그리워하네....`
한여름의 더위가 한풀 꺽이고 인적마저 드문 고대돌담길은
그렇게 어린 우리들의 공간이 되버렸었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누구, 선옥이니?"
"어, 혜란아 난데 너 경희대앞으로 잠깐 나올래?"
"왜? 나 언니 애봐주고 일당받아가야돼. 몇시까지 가면 돼?"
"성태와 같이 있으니까 빨랑 나와, 이앞에서 우연히 만났어"
성태와 같이 선옥이가,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당시 중2였던 애들은 3학년이 되자 무척 바빠졌다.
당연히 우리도 바쁜척을 했다. 같이 3학년이 된걸루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바쁘게 1년이 가고, 그다음해엔 진짜 우리가 바빠졌다.
고대에 가겠노라고 찜해두었던 나는 실업고에 진학했다.
적성 운운하며 1년을 허송세월하고, 인문고로 전학갈 생각으로
또 1년을 보내고, 몇달 앞으로 다가온 취업의 열풍속에서
3학년을 맞았다. 남들은 고3병이 있다지만 난 방학을 맞아
언니네 집에 조카 돌봐주고 일당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누구니?"
"어,언니 선옥이가 이따 나오래"
"선옥이면 옛날 살던 동네, 니친구 아니니?"
"어, 맞어"
"나가봐, 형부도 일찍온다고 했고, 애도 자니깐"
난, 하루벌은 5천원을 쥐고 경희대 앞으로 향했다.
난 그당시 커피값이 없으면 누구든지 만나러 가지 않았다.
친한친구 일지라도 차값을 대신 내달라는건 자존심이 상했으니
실업고에 진학한겄도, 돈을 빨리 벌기 위해서였다.
실업고로는 원서를 써줄수 없으니,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담임
이 엄포를 줬지만 난 엄마와 함께 박카스를 사들고 교무실을
향했다. "선생님, 예가 공부를 썩잘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저희 형편에 대학은 못 보내요. 졸업하면 취직이 잘되는
학교로 원서 좀 써주세요"
담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나를 불렀다.
"너, 집안이 어렵다는말을 왜 안했니?, 말했으면 어머니는
모시고 오지 않았어도 돼잖아"
"애들도 다 부모님 모시고 오잖아요?"
" 그건 성적이 나쁜애를 굳이 인문고로 보내시겠다니까...."
담임선생님과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군 인문고를 사정하러오고, 누군 실업고를 사정하러오고.
그렇게나마 어머니가 오신게 내학교생활 내내 처음이자 마직
막이었다.
"어, 여기야" 선옥이가 손을 번쩍든다.
옆에 앉아있는 저사람이 그럼 성태?
"오랜만이야" "어, 너두"
성태, 많이 변했구나. 키도작고 귀엽고 혀짧은소리 하더니
이젠 나보다 훨씬 크구나.
" 어떻게 지냈어? 공부한다고 다들 유세더니, 그래 어느대학
을 간거야?"
중3때 공부땜에 서먹해진 우리들 사이가 대학얘기로 먼저
간격을 좁혀갔다.
" 어, 대학은 무슨..." 성태가 안경을 벗어 만지작 거린다
" 왜, 니네 공부잘한다며?, 그거 거짓말이였냐?"
" 야, 공부얘기 그만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애기만 할꺼냐"
선옥이가 분위기를 바꾸려 애쓴다.
왜지? 선옥이도 궁금할텐데, 내가 오기전에 계속 그애기를
하고 있었나.
옛날로 돌아가 분식집다디던 얘기, 서로의 생일에 선물 주고
받던애기, 노래부르며 담길걷던 애기,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주경인 뭐해?" 선옥이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래, 주경이가 있었어, 청헤지남방에 깔끔한, 선옥이와
사귀던....`
"지금 종로에서 일해"
"일, 그게 무슨말이야? 대학떨어진 거야"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
"만나면? 요즘도 성태 너랑 자주만나? "
" 아니,자주는 아니고 걔 아마 오늘 친구만나기로 했을껄"
" 어디서?"
" 우리동네 육교 있잖아, 너희도 알지?"
주경이가 보고싶다. 어떻게 변했을까? 그 꼭다문 입은 여전
할까? 왜 벌써 일을 하고 있지? 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 야, 뭐 생각해? "
선옥이가 핀잔을 준다. 선옥이와 성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몇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선옥이는 주경이와 짝이 되나?
다시 만나면 난 또 성태와 짝이되고
아, 꼭 그러고 싶지 만은 않은데..
오래앉아 있었다며, 선옥이가 먼저 일어난다.
"야, 옜날 짝끼리 애기해, 나 먼저 빠질께."
" ?x날짝은 무슨, 우리가 뭐 애인이기라도 한줄 아냐?"
선옥이가 총총히 걸어나가고 성태가 내게 물었다.
" 왜, 옛날이 좋지 않았니? 난 너와 그렇게 멀어진게 너무
아쉬워, 혜란이만 좋다면 다시 만나고 싶어"
아, 또다시 만난다구? 난 니옆에서 주경이만 ?f었는데
그땐 몰랐지만, 지금와서 보면 난 분명 주경이를 혼자서
좋아했었는데. 그래 그때 내가 좋아했던건 분명 주경이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난 주경이를 처음본 모습
그모습 그대로만, 누구의 짝이였던 모습이 아닌, 그모습으로
만 기억하고 있잖아.
물잔에 손이 간다, 물을 마시고 천천히 대답했다.
" 미안해, 성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