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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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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일지매 2000-08-19

엄마와 함께 쓰는 일기



1. 새해-1

저의 이름은 강 준영입니다.
저는 이번 설부터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를 물으면 이제 두 손이 필요해 졌답니다.
동생 성현이는 이제 다섯 살이 되었으니 언제나 제가 한 살 더 많이 먹고 사는 셈입니다. 다른 어른들은 저보고 성현이보다 키가 덜 큰다고 놀리지만 동생이 아무리 더 커져도 형은 언제나 저니까 전 별로 걱정 안 합니다.
엄마는 저에게 그러셨어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엄마 뱃속에 준영이가 자리잡기 시작한 후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를 계산하는 것이지. 그리고 준영이가 얼마나 더 철이 들고, 가슴이 더 넓어지고, 스스로 어린이가 되고, 생각을 더 많이 하고, 몸 움직이는 게 더 정확해지고 재발라지는가에 달려있지. 그게 안되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어른이 될 수 없단다."
잘 이해는 안되지만 동생 성현이랑 싸우지 말고, 음식투정 하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엄마 애먹이지 말라는 뜻인 줄은 알아요.
전 잘못을 해서 엄마에게 가끔 혼나기도 해요. 혼날 때는 무섭고 아파서 울기도 하지만 제가 잘못해서 혼날 때는 전 점점 더 착해지고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되요.
하지만 성현이가 잘못했는데 절 야단치시면 전 점점 더 화가 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엄마가 제 말을 들어주고 미안하다고 하면 금방 화가 풀리고 얼굴도 안 뜨거워져요.

새해-2
어느덧 내 이름이 아닌 "준영이엄마"라고 불리워진 지 벌써 6년째가 되고 있다.
그 사이에 엄마 노릇이 어떤건 지 모르고 실수도 많이 했고,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늘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휘말려 같이 웃다보면 모든 어려움들이 씻은 듯 사라져버리는 거다. 엄마란 마술사가 되는 것 보다 더 대단한 일이다.
아이들을 혼낼 때면 가슴이 아프다. 혼내지 않고 아이들을 다스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늘 조급한 마음에 회초리를 든다거나, 행여 과민하게 화를 내고 난 뒤면, 너무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이 세상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어진다. 내 마음이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니까.
항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철저한 철학과 계획과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직업-그것이 "엄마"이다.

2. 엄마-1
우리 엄마는 뚱뚱하셔요.
자꾸 엄마는 저보고 "엄마 예뻐?"하고 물으시죠. "응"이라고 대답해도 엄마는 자꾸"정말?", "어느 만큼?"하고 물으셔요. 그러면 저는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이라고 대답해요. 그러면 엄마는 뽀뽀를 쪽쪽 하시며 "애그, 내새끼.....!"하며 웃으셔요.
가끔씩 심각하게 "엄마가 뚱뚱해?"하고 물으셔요. "응"하고 대답했다가는 큰일날걸 전 아니까 절대 그렇게는 말 안해요. 하지만 엄마가 거짓말하면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조금, 아주 조금, 그래도 엄마 이뻐"하고 잘 말해주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엄마가 생글생글 웃으시거든요. 전 엄마가 웃는시는게 제일 이쁘거든요.
그런데 성현이는 철이 없어요. 저처럼 말을 안하고 "엄마 뚱뚱해, 살이 올록볼록해, 턱이 불룩해, 배도 불룩해"하고 말해서 엄마 얼굴 못나지게 만들거든요. 성현이는 애기에요, 애기!

엄마-2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인데도 나는 늘 못미더워 "엄마 사랑해?" 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묻는다. 그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들어볼 수 없었던 화끈하고 해맑은 대답을 자꾸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대답들이 나를 더 열심히 삶을 살도록 해준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도 보는 눈이 생기는지 처음 말을 배울 때만 해도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의 자리를 철저히 고수해 왔는데, 어느날엔가 내 옆에 나란히 공동1위에 앉는 젊은 여성들이 생기더니만(유치원 선생님 등등), 요즘은 내 표정을 살펴가며 너그럽게 겨우 공동 1위 자리에 남도록 허락해주는 아이들에게 그 사려깊음을 감사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뚱뚱한 것도 알고, 목소리 예쁜 것도 알고, 마음씨 착한 것도 알고 그네들의 작은 눈에도 투명하고 정확한 잣대들이 생기는 것이다.
주변 어른들과 남편의 온갖 살빼라는 잔소리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내가, 큰아들녀석이 내 다리를 보며 "굵다", "통통하다", "올록볼록하다" 라고 말하는 데는 충격을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다이어트를 생에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3. 복수초-1
우리집은 식물원이에요. 그래서 집이 식물들에게 완전히 쌓여 있어요.
오늘은 아빠가 "복수초"라는 꽃을 방안에 들고 들어오셨어요.
노란색 꽃이 하나 크게 피었는데 아주 예뻐요. 마루에 잘 놔두었더니 가져 올 때만해도 꽃이 반만 열려 있었는데 저녘 때쯤 되니 활짝 피어있었어요. 방이 따뜻해서 힘이 났나봐요. 제가 매일 물을 주기로 했어요. 복을 주는 꽃이라고 하니까 잘 키워서 복을 많이 받아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성현이하고 나눠가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꽃이 불쌍해요. 추울 때 피어서 벌 친구도, 나비 친구도 없이 살아야한다니까요. 성현이랑 저가 친구해줄 수 밖에 없답니다.

복수초-2
아이들이 무얼 알겠냐는 선입견을 늘 여지없이 깨뜨려내는 두 녀석이 오늘도 나를 놀라게 했다.
애들 아빠가 가져온 복수초를 보고, 그리고 그 꽃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은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생각이 달려나가는 것이다. 꽃이 진 후에도 가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남은 생애를 지켜보려고 하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무조건 가르쳐야 한다는 선입관을 내가 먼져 버려야 한다.

4. 두꺼비집-1
오늘은 모래무더기에서 장난을 치면서 놀았어요.
두꺼비집을 짓고 놀았어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이상하죠? 두꺼비는 왜 헌집을 좋아하나요? 전 새집이 좋은데...
모래 속에다 옆에 있던 맥문동의 씨를 따서 심었어요. 아마 내년에는 애기 맥문동들이 많이많이 올라올 거예요.

두꺼비집-2
아이들은 두꺼비 집 짓는 놀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늘 두꺼비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왜 두꺼비는 헌집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그 답은 나도 알 수가 없다.

5. 싸움-1
요즘은 하늘이 매일매일 흐리기만 해요. 그래서 추워서 집안에서 많이 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동생과 많이 싸우게 되는데 그게 문제랍니다. 성현이는 늘 제가 가지고 노는 것만 달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늘 똑같은 걸로 두 개씩 사줘야 한다고 투덜거리신답니다. 전 성현이를 사랑하지만 제 것을 뺏으면 기분이 나빠요. 하지만 "형 그것 좀 줄래~?" 하고 보드랍게 얘기하면 마음이 넓은 저는 안줄 수가 없답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가슴이 빨리 넓어져야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했거든요.

싸움-2
아이들이 물건을 갖고 싸우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한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 소유욕이라는 것은 유치하지만 그 욕구로 인해 사람이 노력하고 경쟁하고 그 속에서 질서도 배운다.
적어도 아이들은 그렇게 싸운 후에도 그 싸운 일을 깨끗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의 싸움 속에는 복수도 없고 원한도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다.

6. 비오는 날-1.
오늘은 비가 오셨습니다. 겨울비래요. 그래서 빗물이 아주 차가와서 맞으면 감기 든대요. 우리는 차가와도 식물들은 괜찮대요. 겨울엔 비가 자주 안 오셔서, 안 그래도 추운데 목까지 마르면 살기가 힘들다고 아빠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비가 오신다고 하늘이 들리게 투덜거리면 하느님한테 혼난대요. 갑자기 넘어지게 만들거나 어디 뾰족한데 부딪히게 만드실거거든요.
지구에는 비가 안 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도 많고, 물이 모자라서 세수도 못하고 마실 물도 없는 곳이 많대요. 그러니 식물도 못 자라고.... 그러니 벼도 못 익을꺼고...그러니 쌀도 없을꺼고.......
창문 밖에 비 오시는 모습을 보니 참 행복해요.
엄마께서 오늘 비오신다고 김치전을 구워 주신대요.
전 반죽을 할 꺼예요. 성현이는 물을 탈 꺼구요.
비오시는 날은 참 고마운 날이예요.

비오는 날-2
비오는 날 김치전은 아주 별미다. 요리를 귀찮아하던 나였는데 아이들이 신명나게 요리를 도와주는 바람에 요즘은 심심하면 새로운 요리를 해본다. 아이들은 특히 반죽하는 것, 계란 거품내는 것을 좋아한다.
연세 많으신 분들은 "사내아이를 요리를 시키냐!"고 호통을 치지만, 난 남녀를 떠나서 생존과 관계되는 생산적인 노동에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기 때문에 그런 잔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오는 날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작은 기쁨도 느낄 수 있으니까.

7. 고마운 것-1
우리 집 마당에는 나무로 차를 끓여 먹는 찻집이 있어요.
거기서 차를 먹어도 맛있지만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는 게 훨씬 맛있답니다.
빨간 숯불을 만들어서 은박지로 고구마를 싸서 깊숙히 집어 넣은 다음 강아지와 한참 놀다 오면 고구마 익은 냄새가 솔솔 납니다.
가끔씩 새까맣게 탈 때도 있지만, 잘만 익히면 전 두 개, 세 개를 먹어도 배가 안 불러요.
불은 참 고마워요.
고구마도 굽게 해주고, 몸도 따뜻하게 해주고, 빛을 내서 밝게 해주고......또....
세상엔 고마운 게 너무 많아서 다 외울 수가 없어요.

고마운 것-2
아이들과 "고마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주 재미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고마움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맹이들이 고마운 이유만 해도 수십가지가 넘는다. 방바닥이 고마운 이유가 열세가지, 나무가 고마운 이유는 끝이 없고, 옷이 고마운 이유도 셀 수가 없다.
난 거의 매일을 아무에게도, 아무 것에도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수 십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8. 읍내 가는 길-1
엄마랑 읍내에 나갔습니다.
일부러 지름길로 갔습니다. 원래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이고, 지름길은 숲 속 길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옆으로 애기 탱자나무가 자라 약간 위험해 보이지만 애기탱자나무의 가시는 찔려도 부드러워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탱자나무길을 벗어나면 논두렁이 나옵니다. 겨울이라 논에는 벼가 없고 벼를 베어낸 밑둥치가 줄을 지어 남아 있습니다. 거기를 밟으면서 걸으면 '뽀드득, 뽀드득" 아주 예쁜 소리가 나서 아주 재미이어요.
가끔씩 물이 고인 자리에는 살얼음이 얇게 끼어 있어서, 밟으면 '빠지작빠지작' 바스라지는 것이 아주 재미있어요. 논둑길은 좁지만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걷기에 딱 맞는 길이에요. 양 팔을 벌리고 걸으면 아주 신이 납니다.
그 논두렁길이 끝나면 멧돼지 기르는 식당이 나오고, 그 다음엔 큰길, 농협과, 성현이랑 제가 좋아하는 농협수퍼가 나옵니다.
그동안 땅을 보면 흙도 많고 돌도 많고 그 사이사이에 풀도 참 많아요.
돌이 많은 길을 걸으면 발바닥에 지압이 되서 건강에 좋다고 엄마께서 말씀하셨어요.
돌이 오래오래 살다보면 흙이 되고 흙이 오래오래 되면 땅속에서 눌려서 돌이 된다고 하니,흙도 돌도 참 오래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착한 물질인거 같아요.
전 시멘트길보다 돌과 흙과 풀이 많은 지름길이 훨씬 좋답니다.

읍내 가는 길-2
요즘은 아이들과 읍내에 볼일을 보러 나가면 아주 재미있다. 아주 어릴 때는 데리고 다니는 일이 중노동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떼쓰고, 울고 안아달라고 보채고 할 때면 흔히들 그러듯 시내 한복판 대로길에서 애들과 꽥꽥거리며 싸우고, 애들은 울면서 뒤따라오고 하던 우스꽝스런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이 좀 크니 잘 걷고 말도 제법 잘 듣는다. 아이들과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모두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대답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함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어른들의 세계도 아이들의 세계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 터이다.

9. 무서운 만화-1
텔레비젼을 오래 보면 눈이 나빠진답니다. 그래서 엄마께서 정해주신 시간만 봅니다.
그런데 어린이프로 시간에 무서운 만화가 많이 나와서 볼 수가 없어요. 무서운 사람도 나오고, 무서운 무기로 사람이 죽고, 못된 말을 하고, 늘 싸우는 만화가 많이 나와요. 그럴 땐 전 다른 걸 틀어달라고 엄마를 조릅니다.
왜 어른들은 그런 무서운 만화를 만드는 걸까요?
우리보고는 싸우지 말고 살아라고 늘 야단치시면서.......

무서운 만화-2
흔하게 나오는 텔레비젼의 로보트 만화조차 무섭다고 보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는 비정상이고 약한 아이들로 인식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비폭력을 가르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