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저 여기 온지 벌써 넉달이 다 되어가요.
할머니는 오늘도 아이들 때문에 바쁘시겠지요...
떠나올 때 할머니가 서천꽃밭에서 가꾼 이쁜 꽃 한송이 들려 주
시면서 가거든 소식 전하라고 하셨었잖아요. 다른 아이들한테
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전 엄마 찾아 갈 일만 흥분되어 잘 몰
랐어요. 할머니가 안스러운 눈길로 절 바라보시다가 제 손을
꼬옥 잡아주시면서,이것이 네 임무다-하셨을 때 전 무슨 얘긴
지 정말 알 수가 없었지요.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그런데요,저 실은 매우 슬퍼요.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니요. 다른 애들
은 엄마랑 아빠 그리고 여러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엄마 아기집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전 가슴 조리며 이렇게 할머니
께 소식을 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지만 아기집 안에서 엄마랑 같이 다니며 들어 보니까, 그런
아기들도 많더군요. 그리고 손 발 다 자라기도 전에 다시 할머
니께 가게 되는 아이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세상에 한
번 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기회인데 그렇게 허무하게 도로 가게
되다니요. 할머니가 화를 내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할머
니가 제게 이렇게 말하게 하시는 이유도요.
그렇지만,전 앞으로 태어나서도 행복하진 못할 거라는 걸 알게
되니까 너무 가슴 아프고 슬퍼요. 엄마나 아빠는 절 사랑한다지
만 사실 엄마는 절 부담스러워 하고 있잖아요. 아빠는 결혼하
면 당연히 아이가 생기는 걸로 생각하고 있으니 호들갑 스럽게
절 축복하지도 않고요. 그런데도 전 아빠에게 더 정이 가요. 사
실 아빠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할머니,
전 태어나기도 전에 다시 돌아 가게 된다고 해도 이제 괜찮아
요. 아기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말이라도 하고 가게 되니까요.
무사히 태어난다고 해도 돌 까지 밖엔 얘길 전할 수 없다는 것
도 알아요. 그 때 까지라도 제 생각을 다 말씀 드릴께요.
그 대신요, 다음에 절 내려 보내 주실때는 제발 아기를 열심히
기다리는 엄마 아빠에게로 보내 주셔야 돼요? 안 그럼 제가 너
무 슬프잖아요.
지난 주 부터요,엄마가 몸 보호하고 절 위한다면서 한약을 먹었
거든요. 방이 좀 따뜻해지니까 살 것 같네요. 엄마의 아기집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얼음장 같아서 저 첨에 무척 애을 먹었어
요. 얼어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게 신기할 지경이지요. 거기다
엄마는 늘 하이힐만 신고 다니는지 무척 흔들려서 떨어져 죽는
지 알았어요. 먹는 것도 다 방부제 섞인 음식이라서 살이 따가
와요.하지만 그런 건 다 참을 수 있었어요.
엄마가,엄마 안에 제가 있다는 걸 아직 모를 때 였어요. 전 엄
마가 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까,얼마나 환영
받을까 하고 들떠 있었지요. 할머니들은 절 기다리고 계셨다는
걸 아시지요? 제가 오기전에 그러셨잖아요. 제 외할머니가 매
일 절에서 기도 드리신다구요.
그런데 할머니,
엄마는 다른 아저씨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아저씨와 도란도란 얘길 나누고, 웃
고,서로 만지고 할 때 까지 전 그 사람이 아빠인 줄 알았어요.
서로 애무하고 키스를 나누고 할 때까진 저도 행복했지요. 엄
마 아빠가 절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는 구나 하고요. 그 때 까
지는 밖의 소리가 잘 안들렸거든요.
엄마가 그 아저씨와 사랑을 나누는 그 순간에 전 알아 버린 거예
요. 제가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데도, 절 무섭게 노려보다
가 가버리는 다른 아기씨들을 보았거든요.
그 중 한 애가 말하더군요.
-니가 이미 그렇게 들어 앉아 있어서 우린 다 그냥 죽어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더 행복해. 적어도 두사람은 서로 사랑하니까...
라고요.
할머니,
그럼, 우리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진 않는 건가요? 그럼 왜 절
생겨나게 했을까요? 다른 아저씨를 사랑하고 있는데,왜 아빠랑
결혼을 했을까요?
전 너무 슬퍼서 그냥 죽고 싶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엄마는 제가 있는 걸 알아 버렸지요. 그리고
그 소식을 그 아저씨한테 맨 먼저 알리더군요. 아빠가 아니고
아저씨 말이예요.
그 아저씨가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너희 부분 피임도 안하냐,,, 이?O어요.
엄마는 제게 조금 미안해 했지요.
그 아저씨와 그렇게 된 건 실수라고,처음 이었다고 그리고 앞으
로 잊어야 겠다고 친구에게 전화로 말하더군요. 다 듣고 있던
울 엄마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결혼 전부터 넌 그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잖아. 아니라고 하지
마. 이제 어떻게 할 껀데? 딱 끊고 잊지 않을 꺼면 아이 지워버
려. 그게 아이한테도 좋을 꺼야,이렇게 얼마나 오래 갈꺼 같니?
사랑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왜 결혼을 한 건데? 이해할 수 없다
널.근데, 정말 남편 아이 맞아?
아무도요,제가 듣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았어요.
전요,참담하는 거 그게 어떤건지 벌써 알아 버렸어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제게 함부로 죽여라 마라 하는 것도 무
서웠지만,태어난데도 엄마를 사랑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슬퍼져
요. 오히려 말이예요,그 아저씨가 제 아빠라면 엄마가 절 더
사랑했을까요?
전 화가 나서 밥도 잘 안 먹었어요.
엄마는 입덧이 심하다고 괴로워했지만 그건 제 탓이 아니라 평
소 엄마가 몸 관리를 안한 탓이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는 아빠
를 원망했어요.
몸이 괴로운데 잘 도와 주지도 않고 챙겨주지 않는다고요.
아빠는 제가 생긴 걸 대견해 하면서도 그런 건 잘 못하는 성격
같았어요. 저도 아빨 닯았을까요?
할머니 부탁이 있는데요,제발 절 아빠랑 똑같이 생기게 해 주셔
요. 엄마 모습 닮고 싶진 않네요.
정기 검진 받으러 병원에 가 보니까요,선생님이 아기가 자라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자라고 싶겠어요...
하지만 먹고 자라야 겠어요.
엄마가 놀라서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까,그래도 절 사랑하긴 하
나봐요.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까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아요.
혹시 아나요,제가 태어나고 나면 아빠랑 사이가 더 좋아 질지
요.그리고 아빠의 아이인 절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잖아요.
오늘 이만 자야겠어요,할머니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들어요.
참,저녁에 아빠가요,천정에 매다는 모빌을 사왔어요. 무뚝뚝해
도 아빤 절 사랑하시나봐요. 그래서 저 기운내기로 했어요.
할머니도 절 위해 기도해 주실꺼죠?
다음에 다시 소식 올릴께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