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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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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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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진짜달팽이 2000-07-28

"야, 저 여자 아니냐, 성배야?"

병희가 가르키는 쪽을 보니 그녀가 전봇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토하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누님, 하고 부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뛰어갔다.

그녀가 나를 보고도 다시 뛰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뛰어가는 그녀의 행동에

무척 놀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병희가 비호처럼 뛰어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내가 달려가려는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병희가 그녀의 따귀를 주먹으로 퍽하고

내리치고 그녀의 팔을 뒤로 꺾으며 말했다.

"이 씨발년아, 몸 파는 년두 모자라서 남의 돈까지 떼먹구 다녀, 엉?

너 같은 년두 사람이냐?"

"저 씹새끼가 미쳤나."

나는 냅다 뛰어가 병희의 팔을 발로 후려갈겼다. 그녀의 꺾인 팔이 풀려나면서

옆으로 고꾸라지는 병희의 아구통을 주먹으로 한 방 내리칠려고 하는데 그녀가 내 팔을

콱 붙잡으며 소리쳤다.

"악! 성배야. 그러지마. 우리 병희 때리지마, 어? 부탁이야. 우리 병희 때리지마아..."

나는 황망하게 팔을 내리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녀는 병희를 모른다.

그런데 우리 병희라니? 내 다리 밑에 엎으러져 있던 병희가 그녀를 천천히 올려다보며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한 듯 내 팔을 놓쳤고 병희가 무언가 말을 걸려는 순간

그녀는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이제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외운다. 나, 스, 타, 샤, 킨, 스, 키.

내가 클럽 모나코에 형님을 따라 갔을 때만 해도 세상은 죽은 사람도 살아올 것 같은

봄기운으로 탱탱하게 차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와보는 이 좁은 시골의 여인숙

방에서 내다보는 세상은 감추어진 건지 사라진 건지 하염없는 눈발만 고요히 맞고

있을 뿐이다.

두 달 전,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고 나와 병희는 그 길로 졸지에 형님에게 수배용의자가

되어 이곳까지 쫓겨왔다.

병희는 한 시간 전부터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병희의 이름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위한다면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그에게 다가가 싱거운 말이라도 건네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치우며 눈치만 보고 있다. 그 동안에도

병희는 말없이 창 밖만 내다보고 있다.

"야, 창틀에 끼어 죽은 네 애인 쳐다보는겨? 니미, 밖에 나가면 산오징어 같이

펄펄한 가시내들이 쌔구 쌨는데 웬 청승이여."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멋쩍어진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잠깐 후 그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내 멱살을 잡는다.

"성배, 너, 이 씹새야. 너 그 여자랑 잤어, 안 잤어, 엉?"

나는 목구멍이 턱 막혀 그의 손목을 붙잡고 멱살을 풀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무슨 독을 품었는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나 또한 그에게 부자유스러운 구석이 있어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다.

"컥, 야, 이 새꺄. 너...... 너, 돌았냐? 컥, 왜 이 지랄이여......"

나는 그가 나를 쏘아보는 그 눈빛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번개처럼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갑자기 그가 맥없이 멱살을 풀더니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솔직하게 말해. 너 그 여자랑 잤지?"

"아..... 안 잤다, 새꺄."

"엉 까는 거 아니지?"

그가 다시 노려보며 물었다. 나는 다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의 눈을 슬쩍 비켜가며.....

나는 왠지 그녀와 함께 했던 달콤한 순간들과 그녀가 잠깐이나마 했던 그녀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녀의 본명까지도 그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는.

그가 나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바다 속에 깊숙이 잠긴

태양빛처럼 출렁거린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씨발, 고향집에 갈거야. 거기 가면 누나가 와 있을 거야. 맞어. 돈을 빌린 것두

아버지 때문이었을 거야. 누나 맞어. 내가 이 손으로 누날 패구 죽일 년이라구...니미, 좆 같은 세상!"

병희는 두 손을 펴서 바라보다가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다가는 이내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고는 뛰쳐나간다.
.
.
.
.
.
.

병희가 떠났다.

그녀도 떠났다.

나도 떠날 것이다.

... 시간을 벽돌로 빚어 띄엄띄엄 병렬할 수 있다면...

그러나 집을 쌓듯 위로만 차곡차곡 올라가는 시간은 견고하게 짜여져 어느 것 하나

손 댈 수 없게 한다. 그것은 하나하나 내 삶에 완벽하게 작용하여

지워버리고 없애버리고 싶은 시간들 조차 고스란히 품어 아파하고 몸부림치며 살아가게 한다.

나는 그녀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그녀가 되돌리고 싶어 하는 시간 속에 남은 나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