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안에서 타원형은 술이 좀 깨려는지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집을 나와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서는 처음엔 주유소에서 먹고 자고 했으며 부탄가스나 본드 흡입,
남자애들과의 혼숙, 단란주점으로 보도 뛰기, 뱃속의 애 떼기 등등......
애 낳는 것 빼고는 다 해 봤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난 백미러로 보이는
택시 운전사의 표정에서 경멸과 조롱의 비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이미 수위를 넘겨 태연자약하고 있는 내게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비질비질 훔쳐보고 있다.
아저씨, 운전이나 잘 해요. 소리 없는 핀잔을 쏘았다.
"학익동 어디께예요?"
운전사가 학익동 찻집 부근에서 물었다. 돌 깨는 브레이커보다 더 요란하던 타원형이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워낙 작은 동네니까 대충 시장 앞에서만 내리면 될 것 같아
거기서 내려 달라고 했다. 타원형을 쌀자루 끌어내듯 내려놓고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부시시 눈을 뜬 타원형이 오랜만에 보는 어두운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언니. 여기가 어디야?"
"시장 앞이야."
"시장? 우리 동네엔 시장이 없는데......"
"그럼 니네 집이 어디야?"
"우리? 신동아 아파트 옆에서 가게 해."
"신동아 아파트?"
마침 지나가던 아줌마가 친절하게도 그곳을 일러준다. 시장을 꺾어 돌아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고. 아뿔싸, 내가 떠나올 때 한참 공사 중이었던 그곳을 말하는가 보다.
끽동이 많이 넓어졌군. 투덜거리며 타원형을 다시 부축해서 걸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있었던 문방구, 전파상, 서점, 보석상들이 그대로 있을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시장 입구에 즐비하던 낡은 상가들도 모두 새단장을 하고 엄마가 하던 미용실과
잘 나가던 약국은 옆 가게까지 집어삼켜 덩치가 제법 커져 있다. 평생 문학산 만큼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댕강 잘려 나가 도로 개통 공사중이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쌓고 부수고, 꺾이고 굽이치고........
아버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2땐가, 등록금 문제로
또 교무실에 불려갔던 내가 집에 가서 책가방을 내던지며 다짜고짜 엄마에게 따져
물었던 적이 있었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엄만 왜 저런 사람하고 결혼한 거야? 저런 사람이 남편으로 그렇게 좋았으면 차라리
자식을 낳지 말던가 했어야지. 이게 뭐야? 나, 공부 계속하고 싶어. 엄마 책임질 수
있어? 대학교는 둘째치고 고등학교까지 만이라도 나 좀 편하게 공부시켜야 되는 거 아냐?"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런 나의 발작을 그대로 삼키고만 있던 엄마가 스르르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낮은 어조로 말했다.
"왜 우리 엄마가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을까 라고 생각지 마라. 엄마가 왜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네 동생이랑 달리 넌
네 아버지랑 꼭 닮아 있어. 껍데긴 엄마를 빼다 박았다고 하지만 속은 죄다
네 아버지 거야. 한없이 무르고 여리고, 이상은 거침없이 꿈꾸고 현실은 끝도 없이
주저하고. 남들 다 하는 짓거리들두 왜 그래야 할까, 안 하면 안돼는 걸까, 끊임없이
캐구 파구....... 네가 그래. 아버지 탓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어떻게든 엄마가
대학까지는 보내주마."
경고였다. 한 시간을 얼어붙은 채 앉아 머리끝으로 치솟는 피를 사력을 다해
낙하시키며 결심했다. 난 문과였지만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대학에선
공과 계열을 선택하겠다고. 아버지와 달리 난 바짝바짝 말라붙은 영혼을 갖겠다고.
그래서 문과 출신도 공부하기가 비교적 만만한 건축학과를 선택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원서 접수하러 가는 날의 아버지 표정을 생각하며 통쾌함을 느꼈다. 그 나이에 걸맞는
가장 고급스러운 수준의 반항이었다. 내 계산은 적중했고 원서 접수하고 돌아온 날
술에 취한 아버지의 절망 섞인 일장 연설을 무심한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유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몇 십억 년 동안을 거듭나며 진화해 왔듯이,
인간은 물론이고 가족도 마찬가지로 진화해 가는 거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활모습과
사유의 방식까지 부단하게 변화해 온 거지. 가족도 대대로 다른 성격, 다른 직업,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듯 하지만, 당뇨나 혈압이 유전되는 것처럼 그 가족의 계보를
타고 이어져 거부할 수 없는 DNA를 하나씩 갖고 살아가는 거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너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고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특별히 너이기 때문만은
아니야. 스스로 자기 상황과 변화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하는 유일한 생물체가 인간이
아니더냐. 그래서 이젠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 방식으로 진화를 주도해가기도 하지.
필요에 따라 번식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포유류라고 해서
앞으로도 포유류일 거라고 단정짓지는 마라. 언젠가 포유로 번식하는 게 불가능해지면
알로 번식할 수도 있는 거야. 그때 내가 널 알로 생산했다고 해도 넌 내 딸이다. 네가
아무리 내 피를 부정하려고 해도 네 몸 속엔 엄연히 내 피가 흐르고 있지. 생김새가
다르고 좋아하는 음악, 싫어하는 인간상이 다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거기에 깊은 의미를
두라는 게 아니다. 내 부모에게 받아서 너에게 흐르게 한 그 피를 네가 진화 시켜주길
바란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번식을 멈추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 각자를 위해, 널 위해서다. 내가 준 씨를 거목으로 피우든
장미나 들꽃으로 피우든, 아니면 메뚜기나 강아지로 피우든 네 자유대로다.
다만 본성에서 출발하라는 거다."
아버진 그렇게 미쳐가고 있었다. 사람을 알로 깐다고? 젊은 나이에도 지팡이처럼
등이 휘어지도록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상으로 세월을 보내다니. 몸서리치는 게 싫어서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늘따라 자꾸 오락실 앞의 두더지처럼
고개를 든다. 다 이 타원형 때문이다.
"언니. 난요, 가출한 게 아니에요."
"? ......."
타원형이 갑자기 내 팔을 뿌리치며 한숨을 쉬듯 말한다.
"난 ?겨난 거예요. 두 마리의 미친 개한테요. 집에서는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고
살림살이며 엄마며 우리 남매며 할 것 없이 보이는 대로 미친 듯이 벽으로 집어던졌구요.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학교에 가면 담임이 안됐다고, 얼마나 아프냐면서
어루만지구 주므르구 더듬구 그랬어요. 지금이라면 당장 짭새한테 찔러 넣을텐데,
그땐 뭐가 그렇게 후달렸는지 몰라. 미친 듯이 내 젖가슴으로 파고드는 그 새끼 손모가지에
칼침이라도 꽂아 놓고 나오는 건데, 씨발."
갈 지자 걸음을 하며 흐느끼듯 중얼거리는 타원형의 모습이 처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