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원형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죄숑함다, 하고 혀 풀린 소리를 내며 앉은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턱을 위로 한껏 젖혀 올리고 자고 있다. 자세히 보니
화장한 얼굴 위로 돋아난 보송보송한 솜털들이 역력히 보인다. 분명히 학생이다.
하지만 그 솜털들처럼 전체적인 모양새가 그다지 싱그럽지는 않다. 오히려 솜방망이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갑자기 어깨 위로 묵직한 무엇이 떨어진다.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육신.
누군지도 모르는 나의 비좁은 어깨 위로 떨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 그래도 지금
순간까지 그 안에서 그녀의 영혼은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봉사하고 있는가.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영혼은 없다. 이미 조로해버려 볼품없이
망가진 저 비대한 살집군(群)과 그 살집을 리모트 콘트롤하는 것으로 제 의미를 다 할
뇌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지금은 정지되어 있다. 껌종이에 달라붙은 껌처럼
끈적거리는 노소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치마 아래께로 달라붙기 시작했고 일행과 함께
낄낄거리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막 새로 올라탄 사람들은 나를 그녀의 언니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얼굴이 후끈 달아 오른 다. 그런데도 이 정지된 타원형을 선뜻
뿌리칠 수가 없다. 그 놈의 솜털만 아니었으면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이 꼬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영등포쯤에서 탄 것 같은
타원형이 종점이 가까워지도록 죽은 듯이 자고 있다. 내 목적지는 주안인데 방금 부평역을
지나쳤다. 생각다 못해 깨워 보기로 했다.
"학생. 학생, 일어나."
드디어 타원형이 내 어깨에 부벼대서 푸석푸석해진 머리통을 겨우 일으키며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찡그린다.
"집이 어디야? 다음이 백운역인데 내릴 데 지나친 거 아냐?"
"어후, 주안에서 내리면 돼요. 집이 끽동이거든요."
끽동? 낯설지 않은데 한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뭐라구?"
순간 타원형이 앉은 채로 머리를 바닥으로 쏟아뜨리자 사람들 눈동자의 동공이
확장되며 타원형 밑으로 집중되었다. 쏟아진 머리칼 때문에 영문을 몰라하던 나는 잠깐 후에
그녀의 파도치는 등어리와 차르륵하고 무엇인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사태를 파악했다.
같이 고개를 숙이고 보니 네 바짓단에 색색가지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다
종점이 가까워졌기에 망정이지, 사람이 많기라도 했으면 나처럼 토사세례를 받은 어떤 남자에게
두들겨 맞았지 싶다. 역시 처음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황급히 휴지를 꺼내
내 바짓단부터 닦아내고 그녀의 입에도 대주었다. 주인 잃은 신문지로 바닥을 덮자 타원형이
뒤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쉰다.
"미안해요, 언니."
어처구니가 없어 이 상황을 어떻게 종결지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틈에 사람들이
토사 냄새와 흉측한 모양의 이 칸을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본 흉칙한
그림 속에 나도 비중 있는 역할로 묶여져 있을 거다. 원래는 내가 본 그들의 그림 속에서
나도 함께 빠져나가고 있어야 하는 건데. 맙소사, 덫이다.
"언니. 끽동 알아요? 학익동 말이에요. 거기가 우리 집이거든요. 2년만에 가는 집이에요.
지금도 거기 있을래나 몰라. 설마 날 버리고 다른 데로 이사가진 않았겠죠?"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내리는 곳이 같으니 다시 난감해진다.
가만, 학익동이라 그랬지?
내가 태어나서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산 곳이 바로 남들이 끽동이라 부르는 그 곳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인 후 우리 가족은 만신창이가 된 각자의 가슴을 고스란히 자기 몫으로
떠안고 그곳을 떠나왔다. 이사는 열댓 번을 갔어도 그 동네를 떠나보긴 처음이었다.
떠나와서 보니 학익동은 정말 자그마한 촌이었다. 이 땅의 끝으로 보였던 문학산, 그 산자락을
따라 꾸덕꾸덕 붙어있던 딱정벌레 같은 집들이 생각난다. 그 주변의 끝도 없이 너른 공장지대에
목을 매고 있던 식구들이 베니아판 몇 장 두들겨서 만든 남루한 둥지들이었다. 공장지대와
주택가를 잇는 지름길엔 창녀촌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버젓이 들어서 있고, 반대편으론
소년 교도소가 사철 음산한 회 빛을 띄고 동네 입구에서 저승사자처럼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론 목재소와 무슨무슨 찻집이 열 맞춰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아원 또한 유달리
많은 동네였다. 공장지대와 사창가, 그리고 볼상 사나운 공무 기관까지 모두 사이좋게
모여 주택가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주택가로써 보호해 주어야 할 어떠한 의무도
당당하게 무시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졌다는 것인지 사창가를 빈정대는 것인지
학익동을 경음화하여 끽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난 그 끽동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 끽동에서의 빈곤한 삶에 지친 것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무능력한 아버지한테 질려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보무도 당당하게.
어쩌다 한번 원고료라도 받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그는 어린 내 덩치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나갔다. 그리곤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 겨울이면 풀빵, 여름이면 아이스케끼 한 봉지씩
사들고 들어왔다. 아주 어렸을 땐 좋아라 봉지로 달려들었던 기억도 있지만 커가면서는
그 봉지를 아버지의 면상으로 집어던지고만 싶었다. 혼자 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럽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이 많아지는 만큼 궁색해지고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였다. 엄마가 그런 남편을 두고도 그가 눈감는 순간까지 묵묵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언니. 아, 씨팔. 왜 이렇게 다리가 꼬이는 거야."
타원형을 부축해서 역을 빠져나가려는데 개찰구 앞에서 그녀가 푹 주저앉는다.
"언니. 나, 몇 살 같아요? 나 사실 학교 계속 다녔으면 지금쯤 수능 땜에 열나
쫄아 있을 걸요."
겨우 그녀를 택시 승강장으로 끌고 가 길바닥에 앉히고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생각대로 타원형은 고등학생 나이밖에 안돼는 애였고 이렇게 만취한
상태에선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갈 거고 오늘 못 들어가면 영영 못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불의를 보면 잘 참아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나와 상관없는 일에 왜 이렇게
말려 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빨리 택시만 태워보내고 가야지 하는데 타원형이
또 내 모난 부분에 자일을 걸어 잽싸게 낚아챈다.
"언니. 울 아버지 아직 살아있을까나? 니미, 그 따구로 술을 퍼대는데 지가 여태까지
살아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지. 울 엄마가 골병들어 죽었거나, 아버지가 술병으로
죽었든가. 암튼 둘 다 무사하진 못 할 걸...... 근데...... 집구석이라구, 오늘 내 친구
생일이라 백화점 가서 쌔빈 돈으로 신나게 술 펐는데 갑자기 그 놈의 집구석엔 왜
그렇게 가고 싶어지는 거야. 내가 미쳤지. 에이, 씨팔. 칵."
하고 가래침을 뱉어내는 그녀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측은지심이란 걸 느껴본다.
그래서 그 애를 눈 딱 감고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어딘가 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언젠가 건축 미학 서적에서 본 것 같다. 저자가 건축에 있어서의 노출과 표현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을 했었다. 노출은 요새 젊은애들이 입고 다니는 배꼽티 밑으로 보이는
배꼽이다. 만약 배꼽티 착용을 금지하는 법령이 생겼을 때, 그래도 젊은이들은 그들의
자유를 발산하기 위해 또 다른 발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살색 면 티셔츠에 배꼽을 그려
넣고 다닌다고 하자. 그럼 그것을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타원형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행동으로 노출시키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었다.